천문학은 우주의 근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는 작업은 현대의 최첨단 과학기기를 사용하더라도 그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하지만 인간은 정밀한 측정 도구가 없었던 고대 때부터 우주에 대한 도전을 시작했다.때로는 농업생산력 확대 등의 필요에 의해,때로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 의해 천문학은 계속 발전해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우리 조상들은 하늘의 해와 달,별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정하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낮 시간과 밤 시간의 간격을 백성들의 생활 리듬에 맞게 조정하는 지혜를 보이기도 했다.일식과 월식을 정확히 예측함으로써 과학의 우수성을 자랑했고,이러한 관측 기록은 오늘날에도 유용한 천문학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농업에 힘써왔기 때문에 농사의 절기를 예보하는 천문학이 중요했다. 천문학자들은 하늘의 운동을 관측함으로써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수확하는 시기를 정확히 알아냈다.
◆삼국시대부터 일·월식 관측
일식의 기록은 고려시대에 쓴 역사책인 삼국사기에 처음 나타난다. 신라에서는 기원전 54년부터 911년까지 965년 동안 29회의 일식이 나타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고구려에서는 445년간 11회,백제에서는 606년간 26회의 관측 기록이 남아있다.
일·월식 외에도 중요하게 관측된 것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움직임이었다. 이런 행성은 국가와 왕의 미래에 영향을 준다고 여겨졌다. 혜성도 중요한 천문현상으로 꼽혀 신라에서 32회,고구려에서 10회,백제에서 15회 관측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현상을 관측했던 신라의 첨성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16년(647년)에 축조됐는데 높이 9.1m에 아래 지름이 4.9m,위 지름이 2.8m다.
삼국시대의 시간 측정은 해시계나 물시계에 의해 이뤄졌다. 화강석으로 만든 당시의 원반형 해시계 파편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물시계는 삼국시대부터 국가의 공적인 시계로 사용됐다.
고구려의 여러 벽화에는 해와 달,별들이 그려져 있다. 해를 동쪽에,달을 서쪽에 둔 후 청룡 현무 백호 주작을 각기 4방위에 정확하게 그려놨다. 백제는 성왕 23년(545년)에 역(曆) 박사 고덕왕손을 일본에 보냈고 그 뒤 무왕 3년(602년)에 관륵이 역서와 천문서를 가지고 일본에 갔다.
◆고려시대에는 천문과 역법 담당 관리들이 활동
고려시대에도 고려 첨성대라는 천문대가 있었다. 고려 첨성대는 개성의 만월대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높이가 3m며 5개의 기둥 위에 가로 세로 3m인 평평한 사각형의 돌이 얹혀진 형태로 돼 있다. 그러나 설립 연대나 기능 등은 기록에 없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천문과 역법,시간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있었다. 하지만 약 30년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 때문에 천문학은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충렬왕 7년(1281년)에는 중국의 원나라에서 수시력(중국의 역법)을 도입해 천문 관측 시설을 재정비했고 충렬왕 34년(1308년)에는 전문 관청인 서운관을 만들었다. 고려시대에는 오늘날 초신성으로 불리는 객성을 20회,혜성을 67회 관측한 것으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학 연구했던 조선시대
정치적 안정과 농업 생산력의 극대화에 중점을 뒀던 조선 초기에 천문학은 상당한 발전을 거듭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뒤 '하늘의 뜻에 의해 세워진 새 왕조'임을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천문도를 갖고 싶어했다. 권근 유방택 등 11명의 학자들이 수년간의 노력 끝에 만든 것이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석각(돌 위에 새겨넣은) 천문도다.
세종대왕은 천문 관청인 서운관에서 독자적으로 달력을 만들도록 했다. 이를 위해 1432~1438년에 천문 기기 제작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당시 역법 연구를 위해 일했던 사람은 이순지와 김담이었고 천문기기 제작은 주로 이천과 장영실이 맡았다.
1433년 경복궁 안에는 천문대인 간의대를 세웠는데 그 곳에는 별을 관측하는 간의와 혼천의,해시계인 앙부일귀,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등 여러 관측 기기들이 설치됐다. 15세기 조선시대의 천문학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두 번에 걸친 일본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천문 관측 기기들이 불에 타버려 천문학 발전은 멈춰서고 말았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양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천문도인 '혼천전도'는 망원경으로 관측한 태양 달 토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에 대해 지구로부터의 거리와 공전 주기를 그림과 함께 기록해 놨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광복할 때까지 우리나라 천문학은 사라지고 선조들의 과학기술 전통도 단절되고 말았다.
<도움=한국천문연구원 www.kao.re.kr>
장원락 한국경제신문 과학기술부 기자 wrjang@hankyung.com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는 작업은 현대의 최첨단 과학기기를 사용하더라도 그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하지만 인간은 정밀한 측정 도구가 없었던 고대 때부터 우주에 대한 도전을 시작했다.때로는 농업생산력 확대 등의 필요에 의해,때로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 의해 천문학은 계속 발전해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우리 조상들은 하늘의 해와 달,별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정하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낮 시간과 밤 시간의 간격을 백성들의 생활 리듬에 맞게 조정하는 지혜를 보이기도 했다.일식과 월식을 정확히 예측함으로써 과학의 우수성을 자랑했고,이러한 관측 기록은 오늘날에도 유용한 천문학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농업에 힘써왔기 때문에 농사의 절기를 예보하는 천문학이 중요했다. 천문학자들은 하늘의 운동을 관측함으로써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수확하는 시기를 정확히 알아냈다.
◆삼국시대부터 일·월식 관측
일식의 기록은 고려시대에 쓴 역사책인 삼국사기에 처음 나타난다. 신라에서는 기원전 54년부터 911년까지 965년 동안 29회의 일식이 나타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고구려에서는 445년간 11회,백제에서는 606년간 26회의 관측 기록이 남아있다.
일·월식 외에도 중요하게 관측된 것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움직임이었다. 이런 행성은 국가와 왕의 미래에 영향을 준다고 여겨졌다. 혜성도 중요한 천문현상으로 꼽혀 신라에서 32회,고구려에서 10회,백제에서 15회 관측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현상을 관측했던 신라의 첨성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16년(647년)에 축조됐는데 높이 9.1m에 아래 지름이 4.9m,위 지름이 2.8m다.
삼국시대의 시간 측정은 해시계나 물시계에 의해 이뤄졌다. 화강석으로 만든 당시의 원반형 해시계 파편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물시계는 삼국시대부터 국가의 공적인 시계로 사용됐다.
고구려의 여러 벽화에는 해와 달,별들이 그려져 있다. 해를 동쪽에,달을 서쪽에 둔 후 청룡 현무 백호 주작을 각기 4방위에 정확하게 그려놨다. 백제는 성왕 23년(545년)에 역(曆) 박사 고덕왕손을 일본에 보냈고 그 뒤 무왕 3년(602년)에 관륵이 역서와 천문서를 가지고 일본에 갔다.
◆고려시대에는 천문과 역법 담당 관리들이 활동
고려시대에도 고려 첨성대라는 천문대가 있었다. 고려 첨성대는 개성의 만월대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높이가 3m며 5개의 기둥 위에 가로 세로 3m인 평평한 사각형의 돌이 얹혀진 형태로 돼 있다. 그러나 설립 연대나 기능 등은 기록에 없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천문과 역법,시간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있었다. 하지만 약 30년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 때문에 천문학은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충렬왕 7년(1281년)에는 중국의 원나라에서 수시력(중국의 역법)을 도입해 천문 관측 시설을 재정비했고 충렬왕 34년(1308년)에는 전문 관청인 서운관을 만들었다. 고려시대에는 오늘날 초신성으로 불리는 객성을 20회,혜성을 67회 관측한 것으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학 연구했던 조선시대
정치적 안정과 농업 생산력의 극대화에 중점을 뒀던 조선 초기에 천문학은 상당한 발전을 거듭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뒤 '하늘의 뜻에 의해 세워진 새 왕조'임을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천문도를 갖고 싶어했다. 권근 유방택 등 11명의 학자들이 수년간의 노력 끝에 만든 것이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석각(돌 위에 새겨넣은) 천문도다.
세종대왕은 천문 관청인 서운관에서 독자적으로 달력을 만들도록 했다. 이를 위해 1432~1438년에 천문 기기 제작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당시 역법 연구를 위해 일했던 사람은 이순지와 김담이었고 천문기기 제작은 주로 이천과 장영실이 맡았다.
1433년 경복궁 안에는 천문대인 간의대를 세웠는데 그 곳에는 별을 관측하는 간의와 혼천의,해시계인 앙부일귀,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등 여러 관측 기기들이 설치됐다. 15세기 조선시대의 천문학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두 번에 걸친 일본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천문 관측 기기들이 불에 타버려 천문학 발전은 멈춰서고 말았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양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천문도인 '혼천전도'는 망원경으로 관측한 태양 달 토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에 대해 지구로부터의 거리와 공전 주기를 그림과 함께 기록해 놨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광복할 때까지 우리나라 천문학은 사라지고 선조들의 과학기술 전통도 단절되고 말았다.
<도움=한국천문연구원 www.kao.re.kr>
장원락 한국경제신문 과학기술부 기자 wr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