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사람이 아닌 돈이 투표하기 때문에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나 운명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제도 때문…."

"음식점에서 가족끼리 오붓하게 외식을 즐기는 모습이 흔히 눈에 띄는 데,(중략) 자기 가족밖에 생각하지 않는 이기주의가 엿보인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쓰이는 경제관련 교과서에 개념의 오류가 많은 것은 물론 학생들에게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체제,기업에 대해 나쁜 인식을 심어주는 문제성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재정경제부가 최근 한국은행,전국경제인연합회,대한상의,한국개발연구원(KDI)과 공동으로 대학교수 8명에게 의뢰해 초·중·고 경제교과서 114종을 분석한 결과 모두 446곳이 내용 수정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유형별로는 △'1인당 국민소득'을 단순히 '국민소득'으로 표기 하는 등 개념상 오류를 범했거나 부정확하게 서술한 것 200건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설명하면서 1990년대 자료를 인용하는 등 부적절한 사례를 제시한 게 89건 △과도하게 단순한 설명 58건 △편향적 시각을 반영한 내용 23건 △시장경제에 대한 부정적 서술 19건 등이었다.

◆반시장·반자본주의적 표현

D사가 출판한 고교용 경제교과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에서 탈피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가난이 개인의 책임이나 운명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제도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는 인식이 지배적"이라고 기술했다. 가난을 무조건 사회 탓으로 돌리는 듯한 표현이다. 이는 학생들에게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수정이 필요한 대목으로 꼽혔다.

C사의 교과서는 "서양의 자본주의 경제가 200년의 역사 속에서 타락하지 않고 찬란한 물질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청교도적 생활 철학이 물질만능으로 흐르기 쉬운 자본주의 경제를 순화시키고 여과시킨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서술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 비윤리적 본성을 가졌고,윤리의식에 의해 순화시키고 여과시켜야 한다는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세계화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적지 않았다. 한 교과서는 "1968년 24개였던 최빈국 수는 30년이 지난 1999년 49개로 배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군소 신흥독립국이 늘어나 최빈국 수가 증가한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사실을 오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반면 시민단체에 대해선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D사 교과서는 "시장의 실패를 보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각종 시민단체에 의한 활발한 시민운동이다. 시장의 성과를 개선시키기 위한 시민운동에 거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고 서술했다.

◆반기업 정서 부추겨

대기업에 대해선 한국경제 성장과정에서의 공과를 균형되게 평가하기보다는 무조건 개혁 대상이란 식의 표현이 많았다. 한 교과서는 "우리나라는 몇 안 되는 재벌에 경제력이 집중돼 있다. 재벌은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늘리고,은행의 돈을 빌려 필요없는 투자를 많이 함으로써 경제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재벌을 개혁하고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B사 교과서는 "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망하지 않는다"며 기업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자발적인 질서유지에 익숙하지 못한 기업과 개인은 벌률을 위반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는 구성원 간 신뢰를 저해하고 공정 경쟁을 방해하고 있다"(고교 공통·D사)거나 "지나친 이윤추구로 사회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할 줄도 알아야 한다"(중3 공통·D-2사)는 등의 구절도 마찬가지다.

또다른 교과서는 "소유자 중심 체제에서 전문경영진 체제로 변신한 기업만이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기업 지배구조상 전문경영인 체제가 소유자 중심 체제보다 우월하다는 어떤 학문적 근거도 없다는 점에서 편향된 시각이란 지적이다.

◆엉터리 설명

틀린 개념의 단어가 쓰였거나 극히 주관적인 설명으로 일관한 부분도 많았다. D사의 고교 경제교과서는 "음식점에서 가족끼리 오붓하게 외식을 즐기는 모습이 흔히 눈에 띄는 데,(중략) 왕성한 소비욕구 이외에도 자기 가족밖에 생각하지 않는 이기주의가 엿보인다"고 쓰고 있다.

이는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윤리적인 지적으로 경제원리를 가르치는 교과서의 내용으로는 부적절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 고등학교 경제 교과서에는 "노동 공급이 노동 수요보다 크면 임금이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서술돼 있다. 하지만 노동 공급이 노동 수요보다 크면 임금은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기본적 경제 원리를 완전히 거꾸로 설명한 것이다. 이 밖에 우리나라 경제의 현주소를 소개하면서 1999년 자료를 사용하거나 국내총생산(GDP) 통계나 경제성장률 등 각종 경제지표에 90년대 자료를 인용한 것들도 많았다.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교과서에는 미래의 학교 모습을 그린 삽화에 구식 모니터형 컴퓨터가 제시돼 있기도 했다.

차병석 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chabs@hankyung.com


# "주류 벗어난 편향된 시각 차라리 안 가르치는 게 낫다"

교과서의 잘못된 내용들은 모두 교육인적자원부의 검정을 통과한 것이란 점에서 '부실 검정' 시비가 일고 있다.

권남훈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교과서는 학생들이 경제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마치 윤리교과서 처럼 국민계도적 내용이 너무 강조돼 있다”며 “주류 경제학에서 벗어난 편향된 시각이 들어간 것은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권 교수는 "학생들에게 오도된 교육을 시킬 소지가 있는 교과서라면,차라리 안 가르치는 게 낫다"고 덧붙였다.

천규승 KDI 경제교육실장도 "수용성이 강한 학생들에게 특정한 편견을 심어주는 건 문제"라며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아이들이 나중에 사회에 나온다면 개인의 경제생활 뿐아니라 국가경제에도 손해"라고 강조했다.

한편 재경부는 교육부와 협의를 거쳐 2006학년도 교과서부터 문제 내용을 수정하고,교육과정 개편 시한인 2007년2월까지 경제교과서에 대한 대대적인 보완 작업을 벌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