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버린은 결국 떠났다.

2003년 3월 SK주식회사(이하 SK)의 주식 1700억원어치를 소리소문 없이 매집(買集)하면서 한국 증권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던 '소버린'이라는 외국계 사모펀드가 2년여 만인 지난달 완전히 철수했다.

무려 8000억원대의 수익을 싸들고 말이다.

물론 양도 차익(주식을 사고 판 결과 생긴 수익)에 대한 세금은 한푼도 내지 않았다.

외환위기를 겪은 우리에게 한때는 구세주처럼 여겨졌던 외국 자본이었다.

하지만 투기적 속성을 지닌 자본들까지 각종 특혜를 줘가며 무분별하게 들여온 것은 문제였다.

곶감(국부·國富)만 빼먹고 총총히 사라지는 '먹튀형' 외국 자본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높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자성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하지만 외국 자본은 이미 우리 주식시장의 46%를 차지하고 있다.

무작정 내보내고 못 들어오게 막을 수도 없다.

경우에 따라서 약이 되기도,독이 되기도 하는 '외국 자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소버린이 지난 2년간 SK그룹 오너 일가와 벌인 경영권 다툼은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했다.

일단 그 빌미는 SK측이 제공한 측면이 크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적은 지분을 가지고도 순환출자 상호출자 등을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충분한 자금을 가진 세력이 경영권을 빼앗고자 나서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SK만 장악하면 수조원대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SK그룹 전체가 소버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소버린은 SK를 공격하면서 한국 재벌의 '지배구조 문제'와 경영진의 도덕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그룹 총수를 내쫓자"며 소액주주들의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다.

자신들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전도사'를 자임했고 홈페이지를 통해서는 '장기 투자를 통해 한국 국민들과 함께 번영의 길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틈만 나면 재벌 개혁을 부르짖던 일부 시민단체들은 소버린에 합세해 최 회장 때리기에 동참하기도 했다.

'재벌을 해체하고 투명한 기업지배구조를 만들 수만 있다면 주인이 외국 자본으로 바뀌는 것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SK그룹측은 사외이사 제도를 대폭 강화하고 이사회 중심의 투명 경영에 나섰다.

2004년에는 사상 유례 없는 1조6000억원대의 당기순이익을 달성해 일반 주주들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놨다.

그 결과 최 회장은 두 번의 주주총회에서 소버린을 누르며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마침내 소버린은 백기를 들고 SK 지분 전량을 매각했다.

SK를 더 흔들어 보았자 나올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소버린과의 싸움을 통해 SK의 경영 체질이 개선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가도 많이 올랐다.

가끔은 극약 처방이 병을 낫게 하기도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번번이 우리나라 알짜 기업들이 정체 불명의 외국 투기자본들에 시달리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

소버린의 예에서 보듯 이들은 '지배구조 개선'과 '장기 투자'를 약속하며 들어오지만 돈을 벌고 나면 언제라도 털고 나간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정체는 철저히 은폐해 놓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도덕적 잣대만을 들이댈 수는 없다.

국제 증권시장을 배회하는 투기 자본의 하이에나 같은 속성을 마냥 비난할 수도 없다.

또 궁극적으로는 투기 자본이 자본 시장에서 갖는 긍정적인 기능과 역할도 있다.

위험이 큰 사업이라면 오로지 투기 자본만이 고독하게 위험을 떠안으며 투자를 감행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투기 자본은 증권 시장의 적정 가격을 찾아가는 선도적인 기능을 하게 된다.

투기 자본이 자본 시장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게 될지는 역시 우리 내부의 준비에 달려 있다.

투기 자본도 보통의 건전한 자본들과 어깨를 나란히해서 투자할 수 있도록 하되 SK 경우에서 보듯 과도한 차익을 빼가는 것은 막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 국내외 자본이 동등한 기준에 따라 공정하게 게임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내 자본은 손발을 묶어 놓고 외국 자본에 대해서만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용한다면 이들 외국 자본은 제도상의 역차별을 이용해 '특별한' 이익을 챙겨갈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국내 기업이 경영 투명성을 이유로 자유로운 출자를 규제받거나 의결권을 제한받는 등 족쇄에 묶여 외국 자본의 공격에 적절히 대응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또 국내 기업은 주주 명부가 철저히 공개되는 반면 외국 자본은 전혀 공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국내 기업은 몸 숨길 곳 없이 모두 까발려져 있고 외국 자본은 바위 뒤에 숨어서 총을 쏘는 식이다.

경영권을 둘러싼 공격과 방어는 당연히 공정한 조건하에서 이뤄져야 한다.

국내 기업에만 적용되는 '역차별' 규정이 있다면 국내 기업은 항상 불리하다.

'창'은 허용하고 '방패'는 빼앗아 버린다면 결과는 뻔하다.

국내 기업들에도 문제는 많다.

대기업 집단의 체질을 개선해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에 쉽사리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버린은 LG그룹에 대해서도 '경영 참여'를 선언하며 공격적인 지분 매집을 시도했지만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탄탄한 지배구조를 만든 LG그룹은 쉽게 공세를 이겨냈다.

삼성전자의 경우도 외국인 지분이 과반수를 훨씬 넘지만 외국계 자본 그 누구도 현 경영진을 무시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외국계 자본이라고 무조건 이들을 배척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국수주의라는 국제적인 비난을 자초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게임의 법칙만큼은 공정하고 투명하게 하는 것이 맞다.

더욱이 투기적 외국 자본의 손아귀에 국민 경제의 핵심적인 부분까지 모두 내맡길 수는 없다.

글로벌 스탠더드도 국익과의 조화가 필요하며 실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차기현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