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던 젊은 사업가가 있었다.그는 30대 초반에 두 차례 파산을 하고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주식시장을 공부해 단돈 70엔을 가지고 300억엔이라는 거금을 모았다.그는 주식투자로 6개월동안 200억엔을 벌어들인 적도 있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84세였다.

일본에서 ‘주식의 신’으로 불리는 고레카와 긴조(是川銀藏).그는 어려운 환경을 초인적인 의지로 극복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은퇴한 후에는 자선사업에 여생을 바쳐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주식의 신

고레카와 긴조는 수익을 거둘 종목을 정확히 짚어내는 능력을 발휘해 일본 열도를 놀라게 했다.

그는 투자하기 전에 언제나 중요한 통계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 경제흐름의 변화를 포착해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심사숙고해야 성공의 기회를 늘릴 수 있다"며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평상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30대 초반에 사업에 실패한 그는 자신의 모든 운명을 주식시장에 걸기로 결심한다.

당시 일본 주식시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투자자는 장바구니를 든 주부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풍문에 따라 이리저리 종목을 옮겨다녔다.

고레카와는 그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기만 하면 수익을 내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 연구해서 얻은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투자를 했고 결국 1년 만에 원금의 100배 수익을 내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오사카에 고레카와 경제연구소를 설립했고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대학에서 강연 요청도 쇄도했다.

그는 이후에도 미국 중앙은행의 금준비 비율이 낮아지는 것을 보고 금본위제 폐지 날짜를 알아맞혔다.

정보와 자료를 바탕으로 경제 흐름을 예측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 고레카와에게도 가장 어려운 일은 '주식을 언제 팔아야 하는가'였다.

그는 매도 시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투자에 실패한 뼈아픈 경험이 있다.

1978년 도와광업 주식을 주당 120엔에 3000만주를 사들였다.

당시 일본의 광산들은 구리가격 하락으로 적자를 면치 못해 생산을 중단한 곳이 많았다.

그는 구리 수요가 늘어나면 제때에 증산이 어렵기 때문에 구리가격이 곧 폭등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듬해 구리가격이 회복되면서 도와광업의 주가는 409엔까지 올라갔다.

고레카와는 주가가 500엔에 달하면 보유주식의 70%를 팔기로 했다.

그러나 상황이 변해 금속가격이 폭등하고 금값이 700달러를 넘어서자 고레카와도 욕심이 생겼다.

그는 목표주가를 800엔으로 바꾸고 주식보유량도 6000만주로 늘렸다.

1980년 초에 도와광업의 주가가 900엔을 돌파하자 고레카와는 매도시점을 1000엔으로 올렸다.

결국 900엔을 정점으로 주가는 하락세로 반전했고 3개월 만에 400엔 이하로 폭락했다.

결국 그는 이 투자에서 원금만 회수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이후 그에게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81년 9월 스미토모 금속광산은 가고시마에서 700피트 떨어진 곳에 두 개의 갱을 뚫었는데 두 곳 모두에서 품질이 우수한 금광을 발견했다.

고레카와는 신문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 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그는 두 곳의 광맥이 서로 연결돼 있고 광맥의 넓이가 생각보다 클 것이라고 확신하고 조용히 스미토모 금속광산 주식을 사들였다.

매입 당시 주가는 230∼240엔이었다.

그가 스미토모 금속광산의 지분 16%에 해당하는 5000만주를 사들였을 때 주가는 이미 540엔까지 올라가 있었다.

이듬해 3월에 주가가 1000엔을 돌파하자 고레카와는 과감하게 모든 지분을 처분했다.

이 투자로 200억엔을 벌어 그해 일본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번 인물이 됐다.

◆굴곡 많은 삶

고레카와는 나이가 들어 투자자로 명성을 날렸으나 젊은 시절에는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다.

그는 1897년 일본 미야자키현의 한 어촌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무역회사에 취직했지만 회사가 도산하면서 실업자로 전락했다.

고레카와는 16세 때 혈혈단신으로 중국의 다롄(大連)으로 건너가 군수물자 구매를 대행하는 사업을 하면서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중국에서 금속사업으로 큰 돈을 벌기도 했으나 전쟁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파산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철판공장으로 재기에 성공했으나 1927년 발생한 금융공황으로 빈털터리로 전락했다.

그는 두 번의 실패를 겪으면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됐고 결국 3년간 경제이론을 독학으로 공부해 주식투자의 고수가 됐다.

그는 1965년 60대 후반의 나이로 주식시장에 돌아와 콘크리트 관련 주식에 6억엔을 투자해 300억엔을 벌기도 했다.

고레카와는 1981년 스미토모 금속광산에 대한 투자를 마지막으로 주식시장에서 은퇴해 1980년대 불어닥친 일본 주식시장 폭락과 장기침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는 20억엔의 사재를 털어 고레카와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등 여생을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다 1992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태완 한국경제신문 증권부 기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