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게 불고 있는 PC 가격파괴 바람의 요인은 무엇일까.

원래 '거품'이 한껏 부풀어올라 있었기 때문에 가격이 쑥쑥 빠지는 것일까,아니면 경기 부진으로 누적된 '재고 소화'에 급급한 업체들이 눈물을 머금고 출혈 경쟁을 감수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양쪽 다 맞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들은 "PC 가격이 갈수록 낮아지는 것은 시장이 장기간 침체된 상태에서 업체들의 경쟁이 치열해진 데다 신기술 사이클이 단축돼 부품 가격이 급속히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중앙처리장치(CPU)나 메모리,액정표시장치(LCD) 가격이 빠르게 떨어지는 상황에서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소비자의 눈길을 끌 만한 양질의 저가 제품을 봇물처럼 쏟아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마진이 큰 고가 제품을 많이 팔아서 수익을 듬뿍 챙기는 것이 기업 입장에선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었다.

'PC품질의 상향 평준화'로 저가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커졌고,이에 따라 '가격 합리성'이 구매시 가장 중요한 선택의 변수가 됐다.

기업으로선 이제 저가 제품에서 수익을 내는 것이 승패를 가름짓는 관건의 하나가 돼버렸다.

기업의 가격경쟁력 싸움이다.

◆'저가=저수익성'은 아니다!

부품 가격이 하락한다면 제품 가격이 내려가도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을 수 있다.

국내 시장에서 '에버라텍' 브랜드의 저가 노트북으로 승부를 건 삼보컴퓨터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다.

삼보컴퓨터는 지난 5월 경영난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하긴 했으나 수익성이 낮은 제조자설계생산(ODM) 위주로 해외 사업을 꾸려온 게 주 원인이었다.

오히려 '국내 PC사업은 건실하다'고 주장해왔다.

삼보컴퓨터는 실제로 법정관리 신청 직전인 1분기 중 99만원대 노트북인 '에버라텍 5500' 등의 인기에 힘입어 국내사업에서 137억원의 흑자를 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 아무래도 수익성이 적정 수준 밑으로 내려갈 공산이 크다.

삼보는 해외 시장에서 인건비가 싼 이점을 지닌 중국 업체들과의 ODM 경쟁에서 뒤져 수익성이 나빠졌다.

뒤늦게 자체 브랜드로 경쟁했으나 디자인과 성능면에서 우위인 IBM 소니 도시바 등과 겨루긴 힘들었다.

광고비나 마케팅에 대한 투자도 수익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브랜드 PC 업체들은 고가 제품에 광고를 많이 하지만 저가 모델에는 광고비 지출을 꺼린다.

비용이 나갈수록 수익성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가 PC의 비중이 커지면서,그리고 고가 제품은 안 팔리면서 기업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됐다.

이제 기업들은 효율적인 부품 구매 및 대량 생산 시스템,유통망 등을 구축해 원가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최선책이 됐다.

◆생존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사업모델 개발해야

국내 PC시장의 가격파괴를 주도해 온 델컴퓨터의 사업 구조는 양질의 저가 제품이 탄생한 배경을 잘 설명해준다.

이 회사의 '다이렉트 모델'은 중간 유통망을 없애고 소비자의 직접 주문을 받아 판매하는 맞춤형 생산 방식이다.

델컴퓨터의 한국지사인 델인터내셔널 김진군 사장은 "재고가 없기 때문에 부품 가격이 떨어질 때 최저가에 구매할 수 있다"며 "영업비용이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기술을 최대한 빨리 적용해 새 제품을 내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장점으로 인해 경쟁사의 동급 제품에 비해 가격이 30% 저렴하지만 수익성은 양호하다"고 덧붙였다.

델은 이렇듯 독특한 사업 모델 덕분에 세계 1위 PC업체가 됐다. 델은 한국에선 시장점유율이 4%대에 불과하지만 최근 무서운 속도로 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이에 맞서 최근 경쟁업체들도 유통단계의 간소화를 꾀하고 있다.

강력한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PC 업체들과 미국의 델컴퓨터,그리고 소니 도시바 등 성능과 디자인을 앞세운 일본 업체들의 틈바구니에서 삼성 LG 삼보 등 '토종' 업체들은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기업이 이익을 챙기면서도 소비자에게 높은 부가가치를 제공하는 실속있는 제품을 양산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시스템 구축이 절실한 때다.

고성연 한국경제신문 IT부 기자 amaz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