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재계, 기업 투자부진 원인 공방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날(28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하계 포럼에 참석,"현재 대기업이 보유한 현금이 70조원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며 "이 자금이 투자로 이어지지 않으면 잠재성장률(5%) 수준의 성장은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부총리는 그러나 이 같은 '투자기피 증후군'의 원인을 정부의 규제 탓으로 돌리는 시각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들이 성명서 등을 통해 정부를 비판하는 행위 등은 성과를 내는 데 효과적이지 못하다"며 "기업들은 정부에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수도권 공장 신설 규제와 금융회사 의결권 제한 등으로 투자가 부진하다는 기업들의 논리는 억지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투자 규제를 받는 당사자(기업)들이 불편하다고 하소연하는데 규제하는 측(정부)이 오히려 기업들을 공박하면 어쩌란 말이냐"며 "참 답답한 일"이라고 푸념했다.


전경련 관계자도 "현재의 출자총액 규제는 설비 투자를 주도하는 덩치 큰 기업에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며 "자산 규모를 근거로 일률적으로 출자를 규제하는 탓에 2001년 이후 자산 4조원대의 그룹 10곳 가운데 7곳이 의도적으로 자산을 더 이상 늘리지 않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꼬집었다.


안재석 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yagoo@hankyung.com



■ 출자총액제 뭐기에


출자총액제한제도만큼 정부와 재계 간 존폐 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정책도 드물다.


정부 내에서도 부처 간 입장이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규제의 주무 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제도가 원칙적으로는 폐지돼야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재벌 기업들의 경영 행태나 지배구조 등에서 투명하지 못하고 개선돼야 할 점이 많기 때문에 당분간 지속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출자총액제한제도란 말 그대로 대기업들이 다른 회사에 출자할 수 있는 한도를 정해 주고 그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


대기업들이 이 회사,저 회사에 출자를 많이 해 수많은 자회사를 거느리면서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확장하는 것을 막아 보자는 것이 이 제도의 근본 취지다.


과거의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일부 대기업 그룹들이 지나치게 많은 자회사를 거느리게 됐고,그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라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 생겨난 제도다.


우선 그 내용부터 살펴보자.공정거래법 제10조는 자산총액 합계액이 6조원 이상인 기업집단에 속하는 기업은 회사 순자산의 25%를 초과해 다른 국내 회사에 출자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물론 예외 조항도 두고 있다.


예컨대 구조조정이 필요한 기업이나 공공시설 산업에 투자하는 경우,그리고 정보통신·생명공학·환경산업 등 새로운 성장산업에 진출하는 경우 등은 출자규제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그런데 경제계는 이런 규제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제도로 기업활동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과도한 정부 간섭이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구나 요즈음같이 국내외 경제환경이 급변하는 과정에서는 기업들이 사업 영역을 수시로 바꾸고 신규 사업을 활발히 모색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


기업의 다양한 투자 전략까지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기업의 경영 전략은 신속하게 변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예컨대 기업환경이 바뀌면서 지금 영위하고 있는 사업을 버리고 유망 첨단업종으로 빨리 전환해야 하는데 정부가 이를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면 결코 좋은 정책이라고 볼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기업의 경영 유연성과 창의성을 현저히 약화시켜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근래에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국내 주요 기업들이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희생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들의 출자는 제한되는 반면 외국 자본에 대한 출자 규제는 없기 때문에 외국 자본들이 마음만 먹으면 국내 우량 기업의 주식을 많이 사들여 경영권을 탈취할 수 있는 길은 활짝 열려 있다.


최근 SK그룹에 대한 소버린의 공격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들이 경영권을 방어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고,그로 인한 기업 역량의 낭비와 비용 지출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경제계는 이를 막기 위해서도 출자 규제가 폐지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출자총액을 규제한다는 것은 시장경제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정부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출자총액 제한이 무조건 기업이 커지는 것을 막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업들이 몸집을 불리면서 순환형 상호출자 등을 통해 작은 자본으로 많은 계열 기업을 거느리는 등 비합리적인 확장을 막아보자는 것이 정부가 주장하는 정책 취지다.


순환형 상호출자란 A회사가 B회사에 출자하고,B회사가 C회사에 출자하는 등 여러 회사가 차례로 출자하는 형식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한 회사에만 제대로 출자를 하면 다른 회사들은 그 회사를 연결고리로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선단식 경영에서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우선 이들 계열기업 가운데 어느 한 기업이 부실해지면 그 회사만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줄줄이 연쇄 부도에 직면하게 된다.


바둑 용어인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로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정부는 아직도 대기업의 문어발 경영 또는 선단식 경영지배구조가 전혀 시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출자총액 제한이 당분간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기업들의 대부분이 활발하게 사업 다각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자본이 취약한 국내 기업이 국제경쟁을 하는 데는 그룹적 경영 방식이 필수적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중고등학생(한국 기업)에게 대학생 혹은 기성인(세계적 다국적 기업)의 잣대를 대는 것은 맞지 않고 또 그런 잣대조차 기업 규모 자체를 억누르는 그릇된 방식이라는 지적이다.


이계민 한국경제신문 주필 leemin@hankyung.com



■ 출자총액제 역사는


대기업 그룹 계열사들을 대상으로 적용하는 출자총액제한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87년이다.


그러다가 지난 97년 말 밀어닥친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투자 자유화,특히 국내 기업에 대한 인수합병(M&A)을 대폭 허용하면서 국내 기업에 대한 외국인들의 적대적 M&A에 대비하기 위한 경영권 방어 수단을 보장해줄 필요가 있다는 차원에서 98년 2월 이 제도를 폐지했다.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부활시키자는 논의가 제기된 것은 99년이었다.


그해 7월 공정거래위원회가 30대 그룹의 계열사에 대한 98년 1년간 출자 현황을 조사한 결과 97년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선단식 경영의 시정은커녕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고 공정위는 판단한 것.


물론 이에 대해 경제계는 정부가 기업환경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대기업들에 99년 말까지 부채 비율을 200% 이내로 줄이도록 강제함으로써 빚어진 결과라고 주장했으나 결국 99년 12월 출자총액제한제도가 부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