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이는 오늘 학교에서 사회수업 시간에 '님비' 현상과 '핌피' 현상에 대해 공부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 시간에 텔레비전 뉴스에서 쓰레기 소각장 때문에 옥신각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빠와 함께 봤다.

이 장면을 보자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이 생각났다.

지형이는 아빠하고 뉴스의 내용이 님비 현상인지,핌피 현상인지를 놓고 이야기했다.

아빠는 이것이 핌피 현상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지형이는 아무래도 님비 현상인 것 같아서 아빠하고 내기를 했다.

사이좋게 컴퓨터에서 자료 검색을 하는데 지형이의 말대로 이것은 님비 현상이었다.

님비(NIMBY)란 'NOT IN MY BACK YARD'의 약어로 '제발 내 집 뒤뜰에는 가져오지 마시오'란 뜻인데,쓰레기 처리장이나 오물 처리장 또는 원자력 발전소와 같은 더럽거나 위험한 건축물 등의 설치를 내 고장에 가져오지 말라는 주민들의 반대 운동을 말한다.

핌피(PIMFY)란 'PLEASE IN MY FRONT YARD'의 약자로 '제발 그 좋은 시설물을 꼭 우리 고장에 세워 주시오'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2002년 월드컵 축구장 유치 운동의 경우 등이 이에 속한다.

이렇게 검색하다 보니 이와 유사한 '바나나(BANANA) 현상'이란 이론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바나나를 많이 먹자'는 뜻인가 하고 아빠와 함께 살펴보니 바나나 현상이란 'Build Absolutely Nothing Anywhere Near Anybody'라는 신조어로 '어디에든 아무것도 짓지 말라'는 뜻으로 님비 현상과 아주 비슷한 개념이었다.

지형이는 아빠와 동네 쓰레기 소각장 설치에 대해 함께 논의해 보았다.

과일 드시던 엄마가 "쓰레기 냄새와 동네 환경을 생각하면 싫다"고 했다. 지형이는 요즘 쓰레기 소각장 시설은 최신식으로 설치돼 오염 물질 배출이나 악취가 거의 없고, 그 소각장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한다니 오히려 녹지 공간이 넓어져 더 좋다고 주장했다.

옆에서 두 모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빠는 "우리 지형이가 평소 환경에 관심이 많은 것을 보니 환경공학과에 진학해서 우리나라 환경 파수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며 무거운 가방을 메고 이리 저리 학원을 찾아다닌 것도 아니며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닌 일상적인 장면이다.

지형이의 일상이 논술인 것이고 그 일상 안에는 배경 지식이 담겨 있고 비판적 사고나 창의적 사고도 습득돼 발휘됐다.

심지어 문제 해결 능력의 모습까지 확대돼 나타난 것은 논술이 얼마나 우리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지를 잘 보여준 하나의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학교 수업 시간에 들은 님비 현상이나 핌피 현상에 대해 독서실에 가서 외워가며 공부하고 6개월쯤 지난 후 논술 대회에서 이에 대한 제시문을 받게 된다면 지형이는 님비와 핌피의 이론적 의미는 습득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현상들의 본질적 의미나 해결 방안 등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논술 답안을 채점하다 보면 항상 아쉬운 것이 고급 이론으로 무장한 학생들조차 문제 해결 능력에서는 자신의 의견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제시문에서 보여주는 이론의 요약이나 학습을 통해 암기한 추상적 내용들로 가득 찬 경우가 허다하다.

논술이란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펼치거나,상대방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이다.

남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옮긴 수준의 답안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주장은 자신의 의견을 좀 더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고 그 주장에 알맞은 논리적 근거가 뒤따라야 설득력이 강해진다.

그러나 이론적 요약으로 가득 채워지는 논술은 주장이 없는 설명에 불과할 것이고 논리적 근거 없이 이론 제시만 가득할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논술이 아니다.

그러면 의견과 주장과 근거 제시 없이 어떻게 비판하는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것들은 모두 논술에서 꼭 필요한 요소들인데 이것들이 왜 유기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개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건 아마도 살아 있는 생활 논술이 아닌 흥미도 잃고 재미도 잃고 강요와 억지가 대부분인 학습 논술,수업 논술,입시 논술에만 치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형이의 논술 수업에서 우리는 찡그리는 얼굴도 하품 커지는 피곤함도 찾아볼 수 없다.

즐겁고 재미있고 화목하게 논술을 즐겼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물론 생활 논술만 가지고 입시에 대비하기에는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초 공사도 하지 않고 집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집도 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테리어를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논술은 흔히 집짓기에 비유된다.

그것은 눈으로 보이는 집짓기가 기초 공사,골조 공사,벽돌 공사,실내 공사 등의 순서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상식을 쉽게 이해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없었던 벌판에 아름다운 건축물이 창조되는 것은 그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순서를 고려한 여러 요소들의 종합적 결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논술도 마찬가지이다.

글이 완성되기까지 글짓기의 순서를 무시하거나 단편적인 사항만 고려하여 종합적이고 유기적인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그 논술문은 남에게 외면당하는 글이 될 것이다.

좋은 논술문을 쓰려면 좋은 생각의 터를 닦아야 한다.

그 곳에 사고력과 비판력과 창의력의 공사를 마치고 앞으로 전개될 어휘,문장,문단,어법 등의 인테리어를 마쳐 자신만의 아름다운 글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이석록 원장 stonelee@megastudy.net


[ 약력 ]

△(전)서울 화곡고 국어교사

△(전)서울시교육청 전국연합학력평가 언어영역 출제팀장

△(전)EBS 언어영역&논술 강사

△(현)대치 메가스터디 원장

<저서> '2008 대학입시 이렇게 준비하라' '언어영역 학습법' 7차교육과정 교과서 '국어생활' '작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