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나'는 여자로 산다는 게
얼마나 고달픈지
'중국인 거리'를 보며 자란다

와중에 여성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며 성장한다

'수능'에 출제됐던
여성 성장소설
전문을 한 번 읽어보길
[문학이야기(21)] 오정희 《중국인 거리》
항구도시 외곽에 이주한 주인공

화자인 ‘나’의 가족은 전쟁통에 머물렀던 피난지를 떠나 항구 도시 외곽의 중국인 거리로 이주한다. 미군 부대와 기지촌에 둘러싸인 이 도시는 석탄을 싣고 온 화차에서 날리는 탄가루로 늘 그늘져 있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으로는 회충약으로 쓸 해안초 끓이는 냄새가 노오랗게 떠다닌다. 포격에 무너진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일 뿐 거리는 텅 비어 을씨년스럽다.

‘나’는 동네에 사는 치옥과 단짝이다. 치옥의 집 2층에는 양갈보 매기 언니가 세 들어 있다. 동네 대부분의 집은 양갈보에게 세를 주고 있다. ‘나’는 등굣길에 치옥네에 들러 굳이 매기 언니의 방까지 올라가 문 안을 흘끔거리며 치옥을 불러낸다. 매기 언니는 검둥이 애인과 함께 산다. 언니가 외출하면 ‘나’는 언니의 빈 방에 놀러가 화장품, 페티코트, 속눈썹, 미제 비스킷, 유리알 브로치 등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면서 논다. 치옥이 알 굵은 유리 목걸이를 목에 걸고 ‘난 커서 양갈보가 될 테야’라고 단호히 말할 때 ‘나’ 역시 치옥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문학이야기(21)] 오정희 《중국인 거리》
미군부대와 기지촌의 여자들

화자의 가족은 이 도시 못지않게 황폐하다. 단속을 피해 담배 장사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왔던 어머니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계속 동생을 낳고 있으며 성품이 냉정한 할머니는 ‘나’가 하교하면 기다렸다는 듯 막 젖이 떨어진 막내 동생을 업혀 내쫓는다. 아버지는 어렵게 일자리를 구해 가족을 끌고 이 도시로 왔지만 가족을 행복하고 풍족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곤궁한 집안의 어린 딸에게 화려한 물건들이 전시된 매기 언니의 방은 신기한 이국이다. 심지어 언니는 검둥이와 국제결혼을 하고 정말로 이국인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매기 언니의 꿈은 실현되지 못한다. 술 취한 검둥이가 어느 날 밤 베란다에서 언니를 내던져 죽인 것이다. 매기 언니는 전쟁 상황에서 여성이 살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았다. 생계를 위해 외국 주둔군에게 성적 착취를 당하는 한편 몸 파는 여성으로 경멸당한다. 인종 차별적 시선까지 더해져 경멸의 강도는 가혹하다. 할머니는 매기 언니를 인간 망종이라고 하였고 언니의 혼혈아 딸을 짐승 새끼라 칭했다.

그러나 불행한 삶을 산 것은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는 남편이 처제, 즉 자신의 여동생과 연을 맺자 그들과 절연하고 조카딸인 화자의 어머니에게 의탁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생애 내내 고독하니 가공할 만한 불행이다. 고양이에게 저주의 주문을 걸어 갓 낳은 새끼를 물어죽이게 만든 할머니의 잔인함은 가부장제의 희생물의 전범처럼 보이는 삶의 이력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화자의 어머니는 어떠한가? 임신과 출산에 바쳐진 듯한 어머니의 생애를 보며 ‘나’는 ‘제발 동생을 그만 낳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처음으로 여자의 동물적인 삶에 대해 동정’한다. 끊임없는 자식의 생산은 어머니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외려 그 삶을 불모의 것으로 만들었다. 뱃속의 자식에게 시달리느라 세상에 나온 자식을 돌볼지 못하는 어머니는 결과적으로 화자가 가족을 겉돌게 만든다.

이 작품은 매기 언니, 할머니, 어머니 등 세 여성의 삶을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통찰한다는 점에서 여성 소설의 면모를 지닌다. 세 여성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삶을 살지만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고통스러운 희생을 감내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화자의 눈에 여성성은 긍정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내내 소녀일 수 없다. 매기 언니의 방에서 박하술을 마신 날 열기를 식히기 위해 베란다 유리문의 커튼을 열었을 때 ‘나’는 ‘중국인 거리의 이층집 열린 덧문과 이켠을 보고 있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알지 못할 슬픔이 가슴에서부터 파상을 이루며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소녀는 스스로의 여성성을 자각할 시점에 도착하였으되 그 자각에 선행하여 찾아오기 마련인 달뜬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을 엄습한 감정에, 글자 그대로 알지 못할 슬픔에, 사실 꼭 슬픔인지도 알 수 없는 감정에 몸을 맡길 뿐이다.

중국인 청년과 사춘기

[문학이야기(21)] 오정희 《중국인 거리》
이후에도 ‘나’는 여러 차례 창을 열고 이켠을 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을 느낀다. 중국인은 해안가 도시의 소외된 거리에서 자신들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청년은 소외된 자 특유의 감수성으로 가족과 조화롭지 못한 ‘나’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나’ 역시 일상에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답게 낯선 청년의 이국적 신비에 끌렸을 것이다. 둘은 시선으로 조우하였고 그 조우는 생각보다 지속적이었으며 의도한 바 없지만 남몰래 이루어졌다. 중국인 청년은 ‘나’가 여성임을 일깨운 처음의 남자일 것이다. 6학년이 되고 청년에게서 작은 선물을 받은 어느 날 ‘나’는 낮잠에 빠졌고 잠에서 깨었을 때 어머니가 여덟 번째 아이를 낳았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날 초조가 시작된다.

‘나’는 사춘기의 문턱에서 아련한 동경, 성장의 열기, 생명의 혼곤, 아스라한 욕망 등이 얽히고설킨 미로 속을 헤매고 있고 이 단편은 그 미로를 단아하고 치밀하게 그려내며 ‘나’를 세상으로 밀어내고 있다. 매혹적인 여성 성장 소설이다. 2004년 수능 언어영역에 지문 일부가 출제되기도 하였는데 진면목을 보려면 전문을 읽어 보기 권한다.

서울사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