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81) 나도향… '나도향 단편집'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

[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81) 나도향… '나도향 단편집'
나도향은 이상, 김유정과 함께 20대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천재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20년에 ‘청춘’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나도향은 1926년 폐결핵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단편 23편, 중편 1편, 장편 2편, 미정고 장편(유고) 1편을 남겼다. 19세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만큼 초기 소설에는 ‘주관적인 애상을 벗어나지 못해 감상적’이라는 평이 있었으나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에 남긴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가뿐만 아니라 영화감독들에게도 큰 영향을 줘 몇 번이고 재해석되면서 사랑받고 있다.

[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81) 나도향… '나도향 단편집'
나도향은 가문 대대로 의업(醫業)을 이어오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의사 할아버지와 양의사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나도향도 경성의전에 진학했으나 소설과 시집을 밤새워 읽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의대를 그만두고 방랑하는 아들을 집안에서 도와줄 리 없어 나도향은 힘든 생활을 이어갔지만 ‘백조’ 동인에 참여해 쉬지 않고 작품을 발표했다.

초기 작품인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와 명작 ‘벙어리 삼룡이’를 살펴보자. 소설은 그 시대의 풍속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역사서이며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1922년에 발표한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의 주인공은 열두 살 난 여자아이다. ‘벙어리 삼룡이’는 당연히 삼룡이가 주인공이지만 사건의 불씨를 제공하는 인물은 열일곱 살 난 새신랑이다. 1920년대의 10대는 작품에서 어떻게 그려질까.

소학교 4학년인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의 주인공은 ‘웬일인지 나의 어린 마음이 공연히 우울하여졌다’며 자신의 기분을 자주 읊조린다. 그 시대에는 주로 대가족이었을 텐데 소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따로 떨어져 산다. 동생을 업고 엄마와 함께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려도 날마다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 어느 날 자다가 일어난 소녀는 늦게 들어와 식사하는 아버지가 반가워 “아버지!”하고 부른다. 그러자 “아버진 뭐든지 다 귀찮다. 어서 잠이나 자거라”하는 퉁바리만 돌아온다. 소녀는 ‘얼굴이 홧홧하도록 무참한 기분’이 되고 만다.

[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81) 나도향… '나도향 단편집'
아버지와 다투는 일에 지친 어머니가 소녀와 동생을 데리고 외가로 가는 길에 소녀는 외가에서 사랑받을 일에 오히려 기분이 좋다. 어머니가 외가에 가서 아버지 험담을 하며 속 시원해할 거라고 생각하는 소녀에게 어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어제 저녁에 아버지가 술 먹고 야단했다는 말은 하지 말어라”라고 당부한다. 그때 소녀는 ‘집에서 나올 때부터 무슨 불행스럽고 불안하던 마음이 다시 화평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부모의 튼튼하고 안온한 울타리가 세상의 전부이다. 나도향의 초기 작품을 미성숙하다고 하지만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의 마지막 장면이 안기는 감동이 만만찮다.

‘벙어리 삼룡이’와 사랑하는 법

이근미 소설가
이근미 소설가
‘벙어리 삼룡이’는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다. 못생기고 우직한 벙어리 삼룡이는 어린 신랑에게 구박받는 새색시를 동정하면서 충성을 다한다. 나날이 포악해지는 어린 신랑 때문에 새색시의 삶이 나날이 핍진해지자 삼룡이는 자나깨나 새색시 걱정이다. 그러다가 오해가 쌓여 집에서 쫓겨나고, 주인집에 불이 났을 때 새색시를 구하고 삼룡이는 죽음을 맞는다.

우직한 삼룡이의 순수하면서도 저돌적인 사랑이 이 소설의 주제일 텐데, 새신랑이 이 소설의 갈등을 계속 유발시킨다. 귀엽게 자라 버릇이 없고 ‘사람에게나 짐승에게 잔인 포악한 짓’을 많이 하는 새신랑. 모든 걸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삼룡이를 짐승 취급하는 새신랑은 당시 풍습에 따라 겨우 열일곱 살에 장가를 갔고, 예쁜 새색시를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새신랑과 삼룡이의 각각 다른 입장을 헤아려보며 ‘사랑하는 법’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사랑받고 살아야 할 10대는 사랑하며 보내야 아름다운 시절이기도 하다.

이근미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