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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544호 2017년 2월 20일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 기업인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17살 때 일본 철공소에 취직…지배인 승진, 자전거 거쳐 ''소하리'' 기아자동차 공장 만들어

현재의 기아자동차는 현대자동차그룹 소속이지만 1997년 이전까지는 독립된 자동차 기업이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원래의 기아차를 세우고 성공시킨 김철호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에 가서 사업을 배우고 돈을 벌어 한국에 기업을 일으킨 청년의 이야기다.

■ 기억해 주세요^^

우리와 함께 있는 삼천리 자전거와 기아자동차의 역사를 역추적하면 1922년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을 배운 한 젊은이의 꿈을 만나게 됩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기회’를 찾다

김철호는 1905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다. 변변한 농토조차 없는 가난한 집이었다.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까지 한 처지라 더욱 막막했다. 김철호는 일본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그 무렵 가난한 조선 사람들이 만주나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요즈음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돈 벌러 오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1922년, 김철호도 17세의 나이에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다. 우여곡절 끝에 삼화제작소라는 철공소에 취직할 수 있었다. 볼트와 너트를 만드는 직원 열 명의 작은 직장이었다. 성실히 일한 덕분에 4년 만에 그 회사의 지배인이 됐다. 조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하던 시절임을 생각해봤을 때 대단한 성공이었다.

‘3000리호 자전거’를 아시나요?

김철호는 사업을 제법 잘 꾸려 나갔다. 그러던 중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졌고, 그 여파가 일본에도 밀어닥쳤다. 수많은 기업이 문을 닫았다. 삼화제작소도 예외가 아니었다. 너무 사정이 나빠져서 퇴직금 대신 기계를 지급해야만 했다. 다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김철호는 그럴 수 없었다. 작은 창고를 하나 빌려 삼화제작소라는 간판을 달았다. 퇴직금으로 받은 선반으로 볼트와 너트를 가공하기 시작했다. 1930년의 일이다. 스물다섯 살의 조선인 청년 김철호가 삼화제작소 사장이 된 것이다. 품질관리를 철저히 했고 물건 납기를 엄수한 결과 사업은 커져 갔다. 그러던 차에 중일전쟁과 만주사변이 연이어 터졌다. 군수용 볼트와 너트의 주문이 밀려들었다. 공장을 세 개로 늘리고 종업원도 300명이 넘을 정도로 사업이 커졌다. 성공을 거둔 김철호는 자전거를 만들어 파는 일에도 착수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면 자전거에 대한 수요가 폭증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향인 조선 땅은 대부분 도로가 비포장이었기 때문에 자전거가 더욱 필요할 터였다.

1943년, 일본의 패색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속히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회사를 정리하고 나니 500만엔이 됐다. 요즈음 돈으로는 1000억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김철호는 1944년 귀국해 영등포에 경성정공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다음해부터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쓰던 장비들도 옮겨 왔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지만 생산을 중단할 수 없었다. 직원들을 설득해 기계설비들을 뜯어 부산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부산 피란지에서 한국 최초의 완제품 자전거를 생산하는 데 성공한다. 자전거 이름은 3000리호로 붙이고 회사 이름은 기아산업으로 바꾼다. 그때의 이름 기아는 기아자동차가 됐고, 3000리 자전거는 지금의 삼천리자전거에 그대로 남아 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김철호의 꿈은 자전거가 아니었다. 자동차를 거쳐 비행기를 만들고 싶었다. 자전거를 만들며 자동차를 생산하는 일도 진행시켜 간다. 1961년에는 2륜 오토바이를, 그리고 1962년에는 3륜 자동차를 조립하는 데 성공한다. 1964년에는 공채 1기 출신인 김선홍 차장을 일본 혼다자동차에 보내 엔진 생산기술을 배우게 한다. 1970년 김철호는 필생의 대업에 착수한다. 엔진 주물, 기공, 금형 프레스 차체 차축, 도장, 조립으로 이어지는 일관공정의 공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1973년 6월, 드디어 1만6000평에 달하는 소하리 공장이 완공됐다. 현대자동차의 정주영도 와서 배울 정도로 현대식 공장이었다. 그곳에서 국산 자동차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꺼져 가고 있었다. 공장 건설 중에도 많은 시간을 그는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 1973년 11월22일 김철호는 눈을 감았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김철호의 유언이었다. 비행기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자동차의 꿈은 이뤘기 때문일 것이다. 자동차 엔진을 배워 오라고 일본에 파견한 김선홍 차장은 8년 후 기아차의 최고경영자인 회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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