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잃은 내가 만난 운명의 Book
(35) 도메 다쿠오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상) 도덕감정론
[Books In Life] 성숙한 사회의 도덕원리…각자 마음속에 '공평한 관찰자' 있어 타인과 동감하려 해
인간사회의 질서와 번영을 이끄는 원리는 무엇인가? 애덤 스미스(1723~1790)가 남긴 불후의 고전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이 같은 의문에서 쓰인 것이다. 그가 찾은 해답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스미스의 ‘보이지 않은 손(invisible hand)’을 떠 올릴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며, 모든 인간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보이지 않은 손’과 같은 이치의 신이 있어서 인간사회의 질서와 번영은 저절로 달성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했다고 알고 있다. 나아가 많은 사람들은 스미스가 약육강식의 시장경제를 옹호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같은 스미스 이해와 비판은 한마디로 말해 지독한 오해와 편견에 불과하다.

보통 사람이 스미스의 두 책을 직접 읽고 이해하기는 힘들다. 마음을 내어 억지로 한 번 읽을 수는 있지만,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을 쓴 것은 1759년이다. ‘국부론’은 1776년이다. 이후 1790년 죽기까지 스미스는 두 책을 각각 5차례나 고쳤다.

저자는 애덤 스미스 전문가

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
일본 오사카대학 경제학과의 도메 다쿠오(堂目卓生) 교수가 그의 세미나에서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읽기 시작한 것은 2003년부터이다. 이후 5년간 그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스미스의 두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나아가 도메는 그가 이해한 스미스의 생각을 뇌과학자, 사회심리학자, 행동경제학자들에게 소개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스미스를 토론하였다. 도메는 18세기 스미스의 생각이 21세기 오늘날에도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가짐에 경탄하였다. 그렇게 스미스에 몰입한 5년간의 성과가 2008년 『アダムスミス -‘道德感情論’と ‘國富論’の世界-』(中央公論新社)라는 문고본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으로 도메는 2008년도 산토리학예상(정치·경제부문)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것을 2010년 우경봉이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단언컨대 이 책은 스미스의 철학과 경제학의 정수를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고 소개한 세계 최고 수준의 책이다.

운명론적 세계관의 한계

“인간사회의 질서와 번영을 이끄는 원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특정 시대가 되어서야 제기될 수 있는 역사적인 물음이었다. 중세인들은 그러한 의문을 갖지 않았다. 유럽의 중세는 종교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인간사회의 질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한 신의 섭리의 일환이었다. 사회의 질서는 신의 대리인인 교회와 그의 법에 의해 규율되었다. 사회가 번영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사회와 자연은 신의 섭리 가운데 일체로 인식되었다. 사회는 타락한 인간들이 잠시 머무는 곳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자연관과 사회관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0세기 이후 동아시아를 지배한 도덕철학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의 세계에서 자연과 사회의 삼라만상은 어떤 근본적인 도덕원리에 의해 창조되었다. 삼라만상의 본성에는 그 근본적 도덕원리가 각기 그에 상응하는 분수로 깃들어 있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그 조화가 저절로 달성되는 자기충족적인 질서이다. 예컨대 인간은 부모에 효도하고, 임금에 충성하고, 어른에 공경하고, 남편에 순종하고, 친구와 신의를 지키는 본성을 지닌다. 주자는 이를 가리켜 5륜이라 하였다. 15~19세기 조선왕조는 노비와 주인 사이에 타넘을 수 없는 분수가 있다는 또 하나의 윤리를 만들어 냈다. 조선왕조는 5륜이 아니라 6륜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6륜에 충실하면 사회는 저절로 조화를 이루며, 나아가 자연도 감읍하여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내 안의 공평한 관찰자

이러한 중세적 도덕철학이 서유럽에서는 16~17세기의 과학혁명을 맞아 해체되었다. 자연과 사회를 통할한 신의 세계는 부정되었다. 자연의 법칙과 구분되는 사회 질서의 원리는 무엇인가? 이렇게 제기된 새로운 물음에 대해 서유럽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모색한 해답은 다양하였다. 상당수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에 질서를 향하는 어떤 도덕원리가 있다고 간주하였다. 인간은 여전히 신의 피조물이었다.

물론 그 신은 중세의 신과 달리 훨씬 이치로 순화된 존재로 바뀌어 있었다(理神論). 예컨대 로크는 “인간은 신을 닮은 신의 피조물로서 자유를 본성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 인간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사회계약을 체결하여 국가와 법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로크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과 사회의 이해는 엄밀히 말해 종교적 선언이지 과학적 분석은 아니다. 종교적 선언이긴 하지만, 그것이 인간사회를 진보로 이끄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유용한 것으로 지지하고 있을 뿐이다.

스미스가 그의 ‘도덕감정론’에서 추구한 인간과 사회의 이해는 이와 달랐다. 그는 인간의 감정들, 곧 어떤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는 제반 심리활동에 대한 경험적 분석을 추구하였다.

스미스를 이끈 대전제는 인간은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소리 내어 웃으며 즐거워할 때, 왜 그런지 관심을 갖는다. 그 결과 즐거워할만한 이유가 있다고 동감을 하면 그 사람 역시 즐거워진다. 어떤 사람이 소리 내어 울며 슬퍼할 때, 왜 그런지 관심을 갖고, 그럴만한 사연이라고 동감을 하면 그 사람 역시 즐거워진다. 이렇게 어떤 사람의 행위와 감정 표현을 보고, 그것이 타당한 것이지 판단하고, 그 결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인간의 행위를 가리켜 스미스는 동감(sympathy)이라 하였다. 동감의 능력을 갖는 인간은 거꾸로 자신의 행동과 감정이 다른 사람에 의해 어떻게 판단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타인이 동감을 표하면 기쁘고, 그렇지 않으면 불쾌하다. 인간은 기쁨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타인의 동감을 받도록 노력한다.

내 행동도 타인의 동감 받아야

[Books In Life] 성숙한 사회의 도덕원리…각자 마음속에 '공평한 관찰자' 있어 타인과 동감하려 해
이러한 동감 행위가 무한 반복되는 과정에서 인간은 어느덧 어떤 행동이 사회의 동감을 받고, 곧 칭찬의 대상이 되고, 어떤 행동이 불쾌와 비난의 대상이 되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에는 자신과 타인의 행동을 판단하는 또 하나의 자신이 들어선다. 이를 가리켜 스미스는 ‘공평한 관찰자’라 하였다. 한 인간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나인 ‘공평한 관찰자’는 나이를 먹으면서 성장한다. 또한 ‘공평한 관찰자’는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통해 성숙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나아가 ‘공평한 관찰자’는 어느 사회가 대를 물려 이어받은 도덕 감정의 체계로서 곧 역사적으로 진화해 온 존재이다.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이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과 지시에 따른다. 그러면 마음의 평화와 즐거움이 뒤따른다. 여기서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과 그 방종을 용인했다는 속설이 스미스의 실제 생각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스미스는 어느 사회의 질서를 규율하는 정의와 법은 그 사회가 공유하는 ‘공평한 관찰자’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법의 기초에는 어느 사람이 다른 사람에 손해와 고통을 입혀서는 안 되며, 손해와 고통을 입혔을 때는 마땅한 배상과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공평한 관찰자’의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스미스는 인간사회의 질서는 인간들의 동감 능력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고 진화해 온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 점에서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법을 선험적인 사회계약의 소산으로 간주하는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달랐다.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경험주의적이며 진화주의적이다. 19세기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은 실은 스미스를 위시한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 기원을 둔다고 지적되고 있다.

(하편에서 계속)

이영훈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