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잃은 내가 만난 운명의 Book (25) 현진권 편저 '사회적이란 용어의 미신'
‘사회적 경제’는 생산된 결과물을 사회적으로 나누자는 경제를 말한다. 사진은 사회적 경제를 가장 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북한의 식량 배급 장면이다.
‘사회적 경제’는 생산된 결과물을 사회적으로 나누자는 경제를 말한다. 사진은 사회적 경제를 가장 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북한의 식량 배급 장면이다.
인류는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씨족·부족을 이루면서 수렵·채취 생활을 했다. 자연스럽게 인류는 고르게 나눠먹는 평등, 아는 사람들과의 유대감 등 소규모 집단의 윤리를 체화해왔다. 이와 같이 ‘사회’라는 말은 본래 아는 친구나 동료들 간의 관계를 뜻하는 ‘소규모 대면 사회’를 지칭했다. 이런 사회에서 형성되는 질서가 ‘자연적 질서’다. 반면에 현대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규모 익명 사회’에서 형성되는 질서는 ‘자생적 질서’다. 그런데 기나긴 세월 동안 자연적 질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세상사에 대한 인식 구조는 거의 변함없이 지금도 남아 있다. 즉 ‘대규모 익명 사회’에서 형성되는 자생적 질서를 ‘소규모 대면 사회’의 자연적 질서로 인식하려는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 인식 구조의 연장선에서 등장해 20세기 들어 복지국가의 지향과 함께 전면에 부상한 것이 바로 ‘사회적’이라는 용어다. 이는 자생적 질서인 시장경제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를 자연적 질서에 접목하려는 욕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 결과 사회가 공동으로 달성해야 할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집단주의 이념이 확대되고, 이를 위한 유대감과 도덕성을 전제로 한 평등이 강조되고 있다.

‘사회적’이란 관형어

[Book & Movie] '사회적'이란 관용어가 어떻게 잘못 쓰이는지 일깨운다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이라는 용어가 시장경제의 운행 원리에 걸맞은 정의, 권리, 책임, 법치국가 등의 명사를 꾸미는 관형어로 접합돼 이들 명사가 표현하는 참된 의미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이라는 말은 하이에크의 말을 인용한 민경국 교수의 지적대로 ‘족제비 같은 말(weasel word)’이다. 족제비가 알의 내용물은 전부 빨아먹고 겉은 멀쩡하게 남겨두는 것과 같이 명사의 겉은 멀쩡한데 참된 의미의 내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먼저 ‘사회적 정의’다. 시장경제에서 가장 거센 불만은 생산물이 나눠지는 방법이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용어를 따르자면 소득분배다. ‘사회적 정의’는 시장에서의 소득분배는 정의롭지 못하므로 정부가 재분배 정책을 실시해야 정의롭다는 뜻이다. 원시 시대에는 수렵·채취한 것들을 씨족장·부족장이 구성원들에게 고르게 나눠주었다. 그런 점에서 분배의 주체는 그 사회의 우두머리였다. 각 개인이 가진 생산요소는 원시적 노동 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남녀노소에 따라 생산성의 차이도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차이가 난다고 해도 대면 사회의 씨족·부족 관계이므로 생산성의 차이를 고려한 분배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자연히 ‘고르게 나눔’에 익숙해졌고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갈망은 사람들의 인식 구조와 감정에 깊이 박혀 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은 거대한 시장경제에서 소득은 내가 가진 생산요소를 남이 사 줄 때 발생한다. 나의 생산요소는 부모와 같은 제3자가 나에게 준 재능과 재산을 통한 기회, 이를 활용하여 어떤 생산요소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나의 선택, 그리고 운 등의 매우 복잡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그래서 소득은 생산요소에 대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이를 분배하는 인격체는 없다. 정의는 인간행동과 관련되므로 분배와 관련된 행동의 주체가 없는 ‘사회적 정의’란 말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공평한 분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개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헌한 대가로 얻은 소득의 일부를 약탈하려는 의도를 ‘사회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시장경제?

현진권 자유경제원장
현진권 자유경제원장
그런 약탈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 ‘사회적 시장경제’다. 구체적 모습은 소득 재분배, 상업 활동에 대한 규제, 특정 집단이나 산업의 보호와 육성 등으로 나타난다. 이는 물론 법은 국가를 포함해 어느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는 일반성과 달성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목표나 동기를 포함하지 않고 특정 국면만을 금지해야 한다는 추상성 등을 위반하는 것으로서 시장경제의 겉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 같으면서 그 내용은 사라지게 함으로써 시장경제를 와해시키는 기만적 용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용어는 어떠한가? 신중섭 교수에 의하면 국가는 이해 당사자들은 물론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 간의 분쟁을 줄이고 화해와 평화의 수단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후 국가는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까지 해결해주는 기구라는 인식의 확장을 가져왔다. 그 결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용어가 국가의 확대를 교묘하게 감추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권리는 한 개인이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소극적 권리를 넘어 개인은 가난과 실업으로부터 해방될 권리가 있다는 적극적 권리로 확대되고, 이는 ‘사회적 권리’라는 이름 아래 그 권리를 충족시켜야 할 책임이 국가로 넘겨졌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역시 자본가·기업가의 본질을 훼손하는 용어다. 자본가는 자신의 저축을 바탕으로 근로자와 토지 소유자에게 그들이 오늘 필요로 하는 음식, 의복, 주택, 그리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현재의 자원’을 공급하고 그들이 소유하는 노동과 토지라는 ‘미래의 자원’을 사서 시간이 걸리는 생산에 투입하여 미래에 완성되는 완제품을 팔아 이자 소득을 얻는 기능을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용어는 이와 같이 돈을 벌고 자본을 축적하여 경제 성장을 주도하는 자본가·기업가의 이윤을 사회에 되돌림으로써 고르게 나눌 책임이 있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자본가·기업가의 본질을 훼손하는 용어다.

사회적 기업?

김영용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김영용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더하여 근래에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기업의 본질이 더욱 훼손되고 있다. 배진영 교수에 의하면 ‘사회적 기업’은 이윤 추구보다 사회적 가치를 수행하면서 기업의 전문성을 활용하는 기업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국가의 보조금 없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논리적 뒷받침과 실질적 능력이 없다는 데 그 허구의 실체가 있다. 결국 국가의 광범위한 복지 정책에 대한 비판의 예봉을 피하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사회적 약자’는 ‘경제적 약자’를 확대한 것으로서 ‘사회적 강자’에 대비되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남성에 대비되는 여성, 대기업에 대비되는 중소기업, 내국인에 대비되는 외국인, 사용자에 대비되는 근로자(특히 비정규직 근로자), 임대인에 대비되는 임차인, 서울 거주자가 아닌 지방 거주자, 때로는 빚을 얻어 집을 산 이른바 ‘하우스 푸어’가 약자로 분류되기도 한다.

‘사회적’이라는 용어의 범람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대규모 사회에서 형성되는 자생적 질서를 소규모의 대면 사회에서나 적용 가능한 자연적 질서로 회귀시키려는 조류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원시 감정에 머물러 있는 인식 구조와 부합하는 소규모 사회에서의 평등과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고, 도덕적 우월감을 확보하려는 심리적 동기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김영용 <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