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35)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체제선택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35)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체제선택
1945년 해방에서 1950년대까지는 국가건설(state-building)과 체제선택의 시기였다. 이 기간에 식민지 국가인 총독부를 대체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경제체제의 성격이 결정되었다. 해방과 분단, 경제위축과 혼란, 인플레이션, 좌우 대립, 6·25사변, 부패와 부정선거, 원조경제 등 온통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향하도록 방향을 결정한 실로 중대한 시기였다. 출발점에서 방향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서 가는 길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대한민국의 수립에 실패하였거나 시장경제체제가 아닌 사회주의체제가 성립하였다면 우리는 휴전선 너머 북한과 비슷한 사회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가지는 의미는 총독이 대통령으로 바뀌고 일본인 관리가 한국인 관리로 바뀌었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이 자신을 대표하는 의회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고 과세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의미를 지닌다. 식민지 국가인 총독부도 조세를 거두어 공공재를 공급하였지만, 총독은 오로지 일왕에게만 책임을 질 뿐 재정운영을 비롯한 일체의 통치행위에 대해 식민지 주민인 한국인에게는 어떠한 동의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식민지 경제 단절 충격 20년 지속

3년간 미군정 기간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식민지 경제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국민경제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식민지 시기 동안 공업화와 경제성장이 진행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34회 참조). 발전의 동력이 외부에 있고 조선 지역 내 산업 연관도 제한적이었다. 총독부가 일본 본국에 대항하여 조선지역의 산업을 보호하고 독자적인 지역경제를 형성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식민지 경제의 이러한 한계는 해방으로 일본과의 경제관계가 단절된 후 경제가 오랫동안 위축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40년께의 1인당 생산수준은 20년이 지난 1960년대 말에 가서야 회복되었는데 단절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그림). 해방은 분단과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이중의 단절’로 인해 위축된 경제를 회복시키는 동시에 ‘체제선택’을 완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체제선택’은 농지개혁과 귀속재산 처리와 직결되어 있었다. 농지개혁은 분배되는 토지를 개인의 사유로 할 것인가 국유 또는 공유(共有)로 할 것인가에 따라서 토지제도에 큰 변경을 가하는 문제였다.

귀속재산 처리는 식민지 시기의 일본인 재산으로서 미군정을 거쳐 정부에 이관된 막대한 재산을 국유 또는 국영으로 관리할 것인지 아니면 민간에 불하해 민유 또는 민영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이었다. 요컨대 농지개혁과 귀속재산 처리는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막대한 재산의 재분배를 통해 경제체제의 성격을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체제선택’의 결정적 계기였다.

농지개혁은 또한 식민지 시기에 극한적으로 발달한 지주제를 해체함으로써 갈등의 농촌사회를 자작농 중심의 안정된 농촌으로 재편성하였다. 지주제는 북한보다 남한이 월등하게 발달해 있었다. 1945년 말 현재 남한 농경지 중 63%(논 70%)가 소작지였으며, 이 중 49%의 농가가 순수 소작농이고 35%의 농가가 자소작농이었다. 이러한 토지소유의 불균등은 체제를 위협하는 사회불안의 온상이었으며 1946년 3월 북한에서 먼저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이 실시되어 남한에서도 농지개혁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이에 미군정은 우선 1948년 3월 옛 일본인 농지(논의 16.7%, 밭의 6.5%)를 소작농민에게 유상으로 분배하였다. 이후 제헌헌법에 농지개혁 실시가 명시되고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이 공포된 후 준비작업을 거쳐서 일반 농지는 1950년 4월 농민들에게 분배 예정 통지서가 발급되면서 본격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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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되었다. 농지분배는 6·25사변 직전까지 대부분 이루어졌으며 일부 지체된 곳은 서울 수복 후 재개되어 1951년 3월에 완료되었다.

이로써 유구한 역사를 가진 지주제는 완전히 해체되고 ‘자작농 체제’가 성립하였다. 1945년 말 65%였던 소작지 비율은 1951년 말 8.1%로 격감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농지개혁법 제15조에 “분배받은 농지는 분배받은 농가의 대표자 명의로 등록하고 가산(家産)으로서 상속한다”라고 규정해 분배농지에 대한 농민의 소유권을 국가가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상속까지 허용함으로써 농민의 영구적인 소유임을 천명하였다. 이 점에서 농지개혁은 북한의 토지개혁과 크게 다르다. 북한에서는 지주에게 아무 보상이 없이 농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기 때문에 농민의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농지개혁 사회통합에 기여

농지개혁은 시행 후 바로 농업생산성을 끌어 올리지는 않았지만 부와 소득의 격차를 줄임으로써 사회통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농민들은 평등의식을 갖고 지위 상승을 추구하면서 자녀 교육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의식변화가 식민지 시기의 농촌과 크게 달라진 점이라고 할 수 있다. 1945년에 51%였던 초등학교 취학률이 1960년에는 97.5%까지 높아진 데는 농지개혁의 효과가 컸다. 대지주의 소멸로 공업화 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이 약화된 것도 공업화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귀속재산 처리는 민간에 불하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귀속재산은 미군정 말기부터 불하되기 시작하여 정부수립 후 1949년 12월에 귀속재산처리법이 제정된 이후 1950년대 전반기에 급속히 이루어졌다. 귀속재산 불하는 농지개혁과 연동되어 이루어졌다. 귀속재산을 매입할 수 있는 재력은 지주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주를 산업자본가로 전신시킨다는 구상이 있었기 때문에 농지분배의 대가로 지급한 ‘지가증권’으로 귀속재산을 우선적으로 불하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제헌헌법은 광범한 산업을 국유와 국영으로 운영하도록 규정해 사회주의적, 개입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다. 시대 흐름의 영향도 있었지만 방대한 귀속재산을 국가가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4년 11월의 제2차 헌법 개정시 시장경제 체제의 내용이 많이 반영되었는데 이는 농지개혁과 귀속재산 불하로 형성된 시장경제체제를 법적으로 추인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귀속 기업체 산업에 큰 비중 차지

미군정에서 이관받은 귀속재산은 3000억원으로 1948년도 정부 세출의 9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는데 71%가 기업체(사업체)였다. 이들 귀속 기업체들은 상당수가 유실되었지만 1950년대 주요 대기업체 89개 중에서 40%(36개사)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특히 면방직의 경우는 16개 중에서 12개, 금속공업 및 기계공업은 10개 중에서 8개가 귀속 기업체였을 정도로 산업에서 막중한 비중을 차지했다. 6·25사변의 발발로 물가가 크게 오르고 피란 과정에서 지가증권을 헐값에 처분하는 바람에 지주들이 산업자본가로 참여하도록 한다는 당초 구상은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귀속재산 불하는 상업부문에서 활동하던 많은 기업인들이 산업자본가로 변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북한은 식민지 시기의 전시통제 체제를 유지한 채 일본인 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사회주의 경제체제 수립을 위한 기반으로 삼았다. 이러한 체제선택의 차이가 장기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그림).

김재호 교수 <전남대학교 경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