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속 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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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길드 회원 자격과 전체 회원수 엄격히 제한…기술 습득 위해 장인 밑에서 숙식하며 청춘 보내
길드 전체 회원수와 회원권 자격을 주는 것이 엄격히 제한됐다. 특히 동업조합 회원인 장인이 되려면 젊은 청춘은 결혼도 못 한 채 기술 습득에 헌신해야 했다. 장인이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을 거치던 도제나 수련공은 소정의 수업 기간 또는 일정한 고용 기간 장인의 집에서 머물며 함께 생활해야 했다.이들 수련공은 결혼하지 않은 독신자 신분이었기에 고용주인 장인의 집에 기거할 수 있었다. 이는 거꾸로 말하자면 하나의 독립된 장인이 되기 전엔 장가갈 수 없고 노총각으로 늙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침식제’라고 불린 이 제도는 업종별, 시대별, 지역별 편차가 있긴 했다. 장인의 집에 기거하지 않고 결혼해 독립된 가정을 꾸리는 수련공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18세기 건축업종에는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수련공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전통은 다른 한편으론 장인이 그의 집에서 먹고 자는 도제와 수련공에 대해 기술교육이나 작업의 영역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지시와 통제를 하는 가부장 지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수공업 기술을 가르치고 기량을 연마하도록 하거나, 고용 기회를 주고 노동의 대가를 임금으로 지급하는 수준을 넘어서 일종의 부모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직업윤리와 명예까지 지도 교육도제와 수련공은 청소년기에 가정과 부모를 떠나 낯선 곳에서 엄격한 장인과 살아야 했다. 장인은 도제와 수련공이 향후 동업조합의 일원으로서 합당한 직업윤리와 신분적 명예, 긍지, 예절, 덕목 등을 갖추도록 모범과 훈계를 통해 지도하고 교육했다. 이 같은 전통적인 도제수업에 대해 경제사가 구스타프 슈몰러는 “노동과 교육, 기술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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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특권에 맞선 '수공업자 조합' 길드…정치참여 늘며 시의원 절반 차지하기도
일찍이 게르만족은 무기 제작과 관련이 깊은 대장간 일처럼 특수한 기예를 갈고닦을 필요가 있는 수공업을 존중했다.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금속을 다루는 일 외에도 제빵, 정육업, 목수 등이 별도의 수공업 분야로 등장했고,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동업조합(길드·Zunft) 체제로 발전해나갔다. 문헌에 등장하는 동업조합 중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106년 결성된 보름스 어류상인 단체를 꼽을 수 있다. 전설상으로는 마인츠 방직업자 단체가 1099년 결성됐다고 하지만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이어 1128년 결성된 뷔르츠부르크 제화업 단체 등 다양한 단체가 등장한다.초창기 이들 단체는 라틴어로 ‘fraternitas’ ‘consortium’ ‘societas’ ‘unio’ 같은 단어로 불렸고, 훗날 독일어로 된 사료에 따르면 북부독일에선 ‘Gilde’ ‘Amt’ 등이 주로 쓰였다고 한다. 동부독일에선 ‘Zeche’ ‘Einung’ ‘Innung’ 같은 용어로 불렸고, 16세기 이후엔 독일어권 지역에서 ‘Zunft’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됐다. 12세기 동업자 단체 길드 등장길드가 도시국가의 정치 영역에까지 큰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에선 13세기 초까지 대부분 도시에서 30~40개 길드가 활동했다. 베네치아에는 142개 길드가 있었다. 1380년대 크레모나에는 8000명의 길드 조합원이, 볼로냐에는 9000명의 길드 조합원이 활동한 것으로 전해질 정도다.이들은 도시를 장악한 귀족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쳐 무장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면세특권을 철폐하고자 조직적 활동도 했다. 무장 조합들은 성인 또는 구역의 이름을 따거나 별, 선원, 말, 사자, 용 등의 문양을 내세웠다. 피렌체에서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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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경 부활했지만 농업생산량은 급감 '아이러니'
광해군 이후에는 현종 대에 이를 때까지 친경의식이 치러지지 않았다. 친경이 다시 논의된 것은 숙종 대로 남인의 대표 허목이 옛 기록을 근거로 친경의례를 시행하자고 적극 건의한 이후였다. 하지만 친경의 ‘부활’은 쉽지 않았다. 마침 천연두가 유행한 탓에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친경 당일 큰비가 내려 관경대에 설치된 일월오악도 병풍이 찢어지고 소를 끌고 쟁기를 밀 수 없을 정도로 땅이 질척대자 친경 행사가 연기된 것이다. 다음날 현종 왕릉인 숭릉의 능침이 무너지는 사고까지 생기면서 친경의례는 아예 무산됐다.이후 오랫동안 중단됐던 친경의식은 영조 때 되살아났다. 영조는 각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1753년(영조 29년)과 1764년(영조 40년), 1767년(영조 43년) 친경을 거행했다. 1767년 영조는 세손과 함께 친경하고 고사에 따라 친잠(누에치기)도 하기로 했다. 이때 곡식의 종자를 받아 보관하는 장종의식을 같이 치렀다. 정조 때는 대규모 행사로 친경은 하지 않았지만 1781년 윤5월에 적전에서 보리 베는 것을 보는 의식은 거행했다. 친경의식은 고종(1871)과 순종(1909, 1910) 때까지 명맥을 이었다.국왕의 친경의례가 제대로 부활한 시기는 쌀이 전국 장시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는 교역상품이 된 때였다. 인구가 증가하고 가난한 하층민까지 쌀을 주식으로 소비했던 것이다.윤용출 부산대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농업노동 같은 비숙련 노동자가 받는 쌀임금은 18세기 초 하루 8되 수준으로 상당히 높았다. 이는 1970년대 수준에 필적하는 것이지만 이후 쌀임금 수준은 1900년까지 200년간 하락하게 된다. 경상도와 전라도 다섯 지역에서 관찰된 논 1두락당 소작료도 17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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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직접 쟁기 잡고 밭갈이…백성들 농사일 독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 2년(983) 1월 신미일에 ‘왕이 원구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태조를 배향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같은 달 을해일에는 ‘왕이 몸소 적전(국왕이나 천자가 농경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설정한 의례용 토지)을 갈고 신농씨(神農氏)에 제사 지내면서 후직(后稷: 고대 중국의 관명으로 농사일을 주관하던 장관, 주나라의 시조인 기를 가리킴)을 배향했다. 풍년을 기원하며 왕이 친히 적전을 가는 의식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다.고려 성종 때는 왕이 직접 토지를 가는 친경의례뿐 아니라 ‘헌종의식’도 처음으로 거행됐다. 헌종의식이란 ‘왕후가 육궁의 사람을 거느리고 동(늦벼)과 육(올벼) 종자를 싹틔워 임금에게 바친다’는 《주례》의 기록을 근거로 왕후가 올벼의 싹을 틔워 바치는 행사다.성종대에 도입된 이 같은 친경의례를 받들어 이후 일부 왕이 실천에 옮겼다. 1031년(현종 22) 선농에 제사하고 적진을 친경했고, 1048년(문종 2) 후농제를 지냈다. 1134년(인종 12)과 1144년(인종 22)에도 적전을 친경하거나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1144년 이후로 왕이 적전에서 밭을 직접 가는 친경례는 거행되지 않았다. 당시 정치권에선 현실정치를 비판하면서 이상적 통치를 제안할 경우 “적전에서 예를 시행하자”는 논의가 빠지지 않았을 뿐이다. 윤소종(1345~1393)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이 적전에서 친경의례를 통해 민생을 위한 개혁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적극 제안하기도 했다.왕이 농사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취하도록 본격적으로 요구받은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였다. 정도전(1342~1398)은 “농사는 만사의 근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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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한탕주의가 불러온 금융위기 후 쇠퇴의 길로
사치는 정말로 망국의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불변의 요인일까?베네치아나 제노바, 밀라노, 피렌체 같은 16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쇠퇴 원인으로 저명한 경제사가 킨들버거를 비롯해 대부분의 역사가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무역 및 생산의 약화, 스페인 및 포르투갈과의 경쟁에 따른 몰락, 해외시장 독점체제 붕괴, 목재 부족, 흉작, 기상악화 등)과 함께 ‘사치’를 빼놓지 않는다.15세기 피렌체에선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지배층이 고대 전성기 아테네 시민계급처럼 그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려고 했다. 덕분에 이때는 르네상스기 예술가들의 호황기가 됐다. 로렌초 기베르티는 1425년부터 피렌체 세례당의 화려한 동쪽 현관문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가 10만 굴덴을 주고 수출항인 리보르노 항구를 사들이던 해에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계획해 완수하도록 위촉받았다. 피렌체 시민들은 그들의 도시를 ‘제2의 아테네’로 만들고자 했다.베네치아에선 15세기 갤리선에서 노를 저을 노수를 확보하는 게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몰타섬 같은 식민지 출신 사람과 죄수들까지 동원해 갤리선 근무를 시켜야 할 정도로 경제 환경이 급변했다. 오스만투르크에서 노예가 수입된 반면, 탁월한 항해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베네치아 뱃사람들은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피사 등 다른 이탈리아 도시는 물론 멀리 영국 함대로까지 일자리를 옮겼다.이 같은 상황에서 베네치아에서 이미 한자리를 차지한 선원들은 흰담비 가죽으로 안을 댄 금색 옷과 같은 정교한 제복을 입기 시작했고, 점점 부패했다. 선원의 임금은 1550년대부터 1590년대까지 두 배로 올랐지만,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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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의 무모한 시도로 '서방회사' 망하자…국민들 지폐와 주식에 강한 거부감 갖게 돼
자신의 투자수익률을 확인하기 위해 백작과 공작, 백작 부인, 자작 부인 등이 매일 존 로의 집 앞에 줄을 섰다. 로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몰리면서 희망자의 10분의 1도 로를 보지 못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30분만 기다려도 난리가 났을 고관대작들이 로와 잠시 환담을 나누기 위해 6시간씩 기다리는 것도 낯선 상황은 아니었다. 로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술 한 모금이나 유리구슬 세 개를 받고 금덩어리를 통째로 내주는 팸플릿 광고로 사람들을 유인했는데, 실상 프랑스 파리의 투자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더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었던 셈이다.서방회사는 오늘날 루이지애나 등 미국 8개 주에 해당하는 지역의 상업권과 채광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지역 토지는 당시 프랑스 내 토지처럼 부가가치가 크지 않았다. 말라리아가 기승하는 늪지대였던 탓에 초기 식민지 개척자들이 잇따라 목숨을 잃었고, 기대했던 엄청난 규모의 광맥도 발견되지 않았다. 식민지 소유권은 주식을 매입한 사람들에게 약속한 배당금을 지급할 수 있는 만큼의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했다.존 로는 화폐의 본질이 금이나 은이 아니라 공공의 신뢰라고 믿었고, 프랑스 절대왕정이 그 같은 절대적 신뢰를 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서방회사가 수익을 내지 못했고, 존 로와 왕실은행은 화폐 발행을 통해 서방회사 주가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무너졌다. 1720년 10월 1만8000리브르에 달했던 주가는 순식간에 40리브르 수준까지 떨어졌다. 1720년 프랑스 국민에겐 엄청난 투자 손실을, 정부에는 막대한 부채를 남긴 채 은행과 회사 모두 문을 닫았다.존 로는 베네치아로 도망가 극도의 가난 속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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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해회사' 투기열풍에 거품법 제정…주식회사 제도 100년 이상 인정하지 않아
17세기 후반 스페인과의 전쟁 등으로 국채가 급속히 늘면서 영국 정부는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1711년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를 설립했다. 회사가 국채를 매입하도록 하고, 정부가 남아메리카 지역의 무역독점권을 회사에 부여한 것이다. 1720년 영국은 투기 광풍에 휩싸였고 남해회사 주가는 10배 이상 올랐다. 남해회사 뒤를 이어 수많은 주식회사가 난립하는 등 투기 열풍이 전국에 확산됐다.위험을 인식한 영국 정부는 1720년 ‘거품법(Bubble Act)’을 제정해 민간회사가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되는 것을 금지했다. 거품법은 투기를 선동한 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새로운 회사를 설립할 때 의회의 허가를 받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미 거품이 가득 낀 남해회사의 주가가 폭락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수많은 투자자가 파산했고 영국의 주식시장은 혼란에 휩싸였다. 남해회사 파산을 계기로 기업 경영의 투명성 확보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거세졌다. 주식회사 제도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경계심도 커졌다.결국 영국 경제는 이후 100년 이상 주식회사를 현실적 제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남해회사 파산 충격으로 영국 경제의 성장과 산업혁명은 적어도 거품법이 폐지되는 1825년까지는 주식회사라는 근대적 기업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홀로 진행돼야 했다. 이에 대해 론도 캐머런 교수는 일시적 장애물에 불과했다고 보지만 영국의 역사학자 존 카스웰은 거품법이 영국에서 상업혁명의 출현을 40~50년가량 지체시켰다고까지 평가하기도 한다.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름만 ‘남해 버블’이 아니라 ‘미시시피 버블’로 달랐을 뿐이다.네덜란드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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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상인들이 화가 후원…학문과 예술의 전성시대 열려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모두 청나라의 전성기라고 하는 건륭제 시대, 당시 장쑤성(江蘇省)의 상업도시 양저우에는 상인문화가 가미된 독특한 도시문화가 형성됐다. 양저우는 신사와 문인들에게 생계수단을 모색하고 문화·사교계에서 지위 상승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도시로 인식됐다. 융성하던 고증학의 대가들이 양저우를 중심으로 활동하거나 배출됐고, 이를 기반으로 ‘양주학파’가 형성됐다.사대부가 아니더라도 학문에 대한 관심이 많은 곳이 양저우였다. 유명한 상인이었던 마왈관과 그 가문은 장사로 번 돈으로 집에 10만 권의 장서를 모았다. 마왈관의 아들 마진백은 건륭제가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할 때 다수의 귀중본을 제공했다. 마진백은 제공한 책 중 776종이나 진본으로 채택돼 건륭제로부터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하사받았다. 마진백뿐 아니라 포사공, 왕계숙 등 지역 상인들도 500종 이상의 책을 기증해 《고금도서집성》을 받았다. 양저우의 염상 마유도 귀한 책을 많이 바친 기증자 명단에 포함됐다. 휘상 가문 출신 정진방은 베이징 한림원에서 옹방강(翁方綱·1733~1818)과 함께 《사고전서》의 교감과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당시 상인 중 상당수는 학위를 가진 신사이기도 했다.《사고전서》 편찬 당시 중국 각 성의 순무들이 제출한 4831종의 책이 《사고전서》에 수록됐는데 이 중 17.8%인 861종이 장쑤성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장쑤성 제출 저서의 대부분은 양저우에서 수집된 것이었다.하지만 양저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문화적 특색은 미술이었다. 부유한 재력을 지닌 소금상인(염상)들이 적극적으로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자연스럽게 각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