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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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백제·왜 동맹군과 고구려, 신라와 연합한 당과 전쟁. 동아시아 질서 재편전쟁…70년 소용돌이 휘말려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많은 이들이 하는 말이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에 가정은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가정(What if)’이 없다면 역사는 박제물일 뿐, 현재와 미래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라가 주도한 이른바 삼국통일은 불완전했지만 의미가 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후 전개된 역사를 살펴볼 때 고구려가 민족통일을 했다면 더 긍정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백강과 탄현 방어 못한 백제의 멸망고구려에 대패한 당태종은 648년에 죽고, ‘고구려 멸망’이라는 숙명적인 중국의 과제는 고종이 이어받아 659년까지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다. 660년 음력 7월 초,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군대와 1900여 척의 함선(삼국유사)이 산동반도의 성산항을 출항했다. 서해를 횡단한 수군은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서 대기하던 신라 함대 100척과 합류한 뒤 백제의 경기만과 당진·홍성·군산 등 해안에 상륙했다. 주력군은 금강하구 전투를 끝내고 수륙양면군으로 수도 사비성 공략을 시도했다. 이 무렵 5000명의 결사대를 지휘한 계백 장군은 나당 상륙군과 협공하려는 김유신의 5만 군대를 저지하다가 황산벌에서 산화했다. 백강과 탄현 방어를 간언한 성충과 흥수라는 전문가를 배척한 의자왕은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해보고 항복했다.백제에선 바로 저항군이 결성돼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고, 왜국에 도움을 청했다. 왜국은 정세 판단의 미숙과 해전 능력 부족 때문에 파병이 더뎠다. 일본 천황(이하 역사서 명칭에 따름)이 661년 2월 규슈 북부에 도착해 임시관청을 설치하다 죽고, 뒤이어 아들 덴치(훗날 천황)가 8월에 군사와 무기, 식량 등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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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준비로 수나라와 16년 전쟁 승리한 고구려…동아시아 종주권 확고히 하며 위상 한껏 드높여
서기 598년, 고구려가 요서지방을 공격하면서 수나라와 ‘고·수(高·隋)전쟁’의 신호탄이 올랐다. 이후 ‘고·당(高·唐)전쟁’을 거쳐 신라가 참여한 이른바 ‘삼국통일전쟁’까지 지속됐다. 전쟁의 목적과 진행 과정, 결과 등을 보면 몇 단계로 구성된 ‘70년 전쟁’이었다. 한륙도(한반도와 만주 포함)·중국·일본열도·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가 포함된 유라시아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그레이트 게임이었다.유라시아 동쪽은 1세기 이상 분단된 남·북 중국, 몽골 초원의 유연, 동쪽의 패자인 고구려 등 4핵과 그 주변에 백제·신라·왜·말갈·거란 등의 소핵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다원적인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6세기 말에 동아시아는 중국을 통일(589년)한 수나라와 튀르크제국, 고구려의 삼각구도로 재편됐다. 400년 만에 중국을 장악한 수나라는 정치·경제적 통일을 추진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해 중화 종주권 탈환에 나섰고 고구려도 신흥 강국들과 경쟁·대결이 불가피했다. 수나라 공격 막은 요동성 성주 강이식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모든 국가와 종족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하는 국제대전이 본격 터졌다. 612년, 수양제가 이끄는 113만여 명의 다국적 군대가 북경 근처 탁군을 출발했고, 그 두 배에 달하는 보조 인력이 동원됐다. 총 24군 편제인데, 11군은 수군으로 작전범위가 압록강 하구, 평양, 한강유역까지였다. 출항한 배의 행렬이 수백 리에 걸쳐 늘어설 정도였다. 육군을 지휘한 수양제는 요하 도하작전을 어렵게 성공시킨 뒤 요하전선의 몇몇 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부(副)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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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중국, 유연, 고구려 등 세력균형 이룬 동아시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청나라가 벌인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조선의 개항과 멸망, 식민지화를 초래했다. 20세기 중반 미국과 소련이 치른 그레이트 게임은 한민족의 분단과 비극적인 6·25전쟁을 몰고왔다. 최근엔 미국과 중국 간에 ‘새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서기 598년, 고구려 영양왕은 말갈병(또는 거란병) 1만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공격했다. 《수서(隋書)》의 또 다른 기사는 이 공격에서 고구려가 해양방어시설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곧 30만의 수륙군으로 반격했으나 육군은 역병이 창궐해 요하전선을 넘지 못했다. 한편 래호아가 지휘하는 6000명의 산동수군은 평양성을 향해 출항했지만 폭풍우를 만나 배들이 표몰됐고,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고 한다(《수서》). 하지만 기상조건들을 분석하면 장산군도 등에 구축한 해양방어체제에 막히고 고구려 수군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70년 전쟁의 신호탄 ‘고·수전쟁’이렇게 ‘고·수(高·隋)전쟁’의 신호탄이 올랐고, ‘고·당(高·唐)전쟁’을 거쳐 신라가 참여한 이른바 ‘삼국통일전쟁’까지 지속됐다. 전쟁의 목적과 진행과정, 결과 등을 보면 몇 단계로 구성된 ‘70년 전쟁’이었다. 한륙도(한반도와 만주 포함)·중국·일본열도·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가 포함된 유라시아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그레이트 게임이었다.유라시아 동쪽은 1세기 이상 분단된 남·북 중국, 몽골 초원의 유연, 동쪽의 패자인 고구려 등 4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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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화랑, 충성·용기·우애 갖춘 인재 양성제도…자유의지와 사명감으로 삼국통일 위업 달성 앞장
신라의 화랑은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화랑은 ‘풍월도’를 수행하는 젊은이 집단이다. ‘화랑도’는 일본 학자 미지나 아키히데가 만든 조어다.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576년) 봄에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했다고 기록했지만, 이미 풍월주가 있었다. 신채호나 최남선 등의 견해를 고려하면 원조선을 계승하면서 건국 초부터 비슷한 조직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5세기부터 고구려 문화와 ‘조의선인(고구려의 수행자 군사집단)’ 등의 영향을 받으며 구체화되고, 질적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강국의 기초 ‘화랑’최치원이 쓴 《난랑비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고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많은 생명과 만나 변화를 이룬다. 들어와서는 집안에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 그들은 ‘하늘(天)에 대한 맹세’를 하고,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혼란하면 가히 맹세를 행한다’는 내용을 돌에 새겼다(임신서기석). 또 승려인 원광은 7세기 초, 위기 상황에서 화랑의 역할을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정의했다. ‘충과 효’라는 국가의 가치관과 ‘우애와 용기’라는 사회적 가치관, 그리고 생명을 존중하는 인간상을 구현하는 ‘청년결사체’를 지향한 것이다.차세대 리더들인 화랑은 왕 또는 고승이 추천한 왕족이나 귀족 자제들이었다. 각각 수백 명에서 1000명 정도의 낭도를 거느렸다. 그들은 독특한 수행 방법을 지녔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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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세기부터 변혁과 전략적 거점 확보 추진 선진문물 수용하며 변방국가서 강국으로 발돋움
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와 사회, 문명을 건설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산업력’ ‘기술력’ ‘무장력’ 등이 떠오르지만 근본은 ‘사람의 힘(人力)’이고, ‘사람산업(정신사업 인재양성사업)’이다.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문화국가’ ‘경제국가’라고 자만한 아테네에 승리한 근본적 이유는 단결심, 애국심, 책임감을 지닌 시민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경주 거대 고분, 강력한 왕권 확립 시사신라는 4세기 말까지도 세계 질서에 어두웠고, 자체의 통일조차 완수하지 못한 변방의 ‘소국연맹국가’였다(이종욱 교수). 그런데 5세기에 이르면서 신라 내부에 엄청난 변화가 발생했다. 그 증거가 경주 대릉원에 남은 큰 규모의 고분들과 그 안에서 발견된 황금유물들이다. 동서 길이 80m, 남북 길이 120m, 높이가 25m나 되는 황남대총(98호 고분)을 비롯한 거대한 고분들은 강력한 왕권의 출현을 의미한다. 기술력과 경제력도 급신장했음을 알 수 있다.경주 지역에서만 6개 발견된 금관·허리띠, 금목걸이를 비롯한 각종 황금유물과 구슬·유리제품들은 부가가치가 절대적인 금광산업과 화공기술이 발달했고, 상상을 뛰어넘는 공예 기술력 또한 갖췄음을 증명한다. 알타이 산록의 이식고분군에서 발굴된 황금인간, 사르마트 금관, 틸리아테페 금관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기술과 미(美)의식은 신라가 매우 수준 높은 문화사회로 진입했으며, 국제사회에 적극적이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고구려로부터 선진 문물과 기술력 배워알타이 유목민 문화와 비슷한 적석목곽 고분과 금관 등 부장품들, 유리제품 등 수입품을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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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에 불교·탈춤·음악 전파…중국엔 도금갑옷 수출
불교를 정치·경제 목적으로도 倭에 전해백제의 대(對)왜 정책은 6세기에 들어서 불교문화를 정치·경제적인 목적으로 전파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수도를 부여로 옮긴 성왕은 높이 16척의 ‘장육불’을 제작해 왜국에 기증했으며, 노리사치계를 금동불상, 번개(幡蓋·불상 위를 덮는 비단), 경론(經論) 등과 함께 파견했다. 또 588년(위덕왕 35년)에는 승려들과 조불공, 조사공(명주실을 켜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노동자), 노반박사(탑 기술자), 기와박사, 화공 등을 파견해 아스카사를 조성하는 데 도움을 줬다. 본존인 아스카 대불을 제작한 구라쓰쿠리도리(鞍止利)는 백제계라고 한다.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는 옛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다. 독일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는 “인간 실존의 참다운 모습을 이토록 표현한 예술품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품격이 다른 예술품이다. 제작 주체를 놓고 많은 설이 있었지만, 형태가 우리 것들과 비슷한 데다 목재가 한반도에서 자라는 적송으로 밝혀지면서 백제 또는 신라 제품이거나, 왜국에 정착한 조불사가 만든 것으로 정리됐다. 또 담징의 금당벽화로 유명한 호류지(法隆寺)의 대보장전에는 209㎝의 훤칠한 키와 우아한 손끝으로 옷자락을 살며시 든 7세기께 관음보살상이 전시돼 있는데,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이 불상에는 ‘백제’라는 이름이 붙은 채로 내려왔다. ‘백제’ 이름 붙은 호류지 관음보살상백제는 직조산업이 발달해 6세기께는 베·비단·명주실·마 등을 세금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4세기에 재봉기술을 가진 공녀(工女)를 왜국에 보냈고, 418년에는 백색 명주를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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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로 발전하며 문화정책 힘 쏟은 백제의 유산
방탄소년단(BTS)의 음악이 연속 3회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적이 있다. 유라시아대륙을 몇 번 횡단했는데, 매번 한류(韓流)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란의 이스파한시에서는 싸이의 말춤을 시민들과 함께 췄고, 중앙아시아의 사막을 횡단할 때는 “주몽”을 외치며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청년들과 신나게 웃어 젖히기도 했다. 2019년 한국의 문화콘텐츠 수출은 103억달러였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은 2019년 11월 말까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박스오피스 매출이 1억1000만달러에 이른다. 정보, 통신, 건축 등을 포함한 문화산업의 규모와 이익은 이보다 훨씬 더 크다. 기쁘고도 놀랄 만한 현상이다.우리 역사에서는 이 같은 문화산업 및 문화수출 현상이 없었을까? 백제가 멸망할 때 인구는 고구려보다 많은 76만 호(戶), 약 380만 명이었다(《구당서》 《삼국사기》). 농경, 어업은 물론 상업, 무역이 활발하면 국부가 창출되고 경제력이 강해진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시대에 예성강 이북까지 북상했고, 마한 지역을 장악한 뒤 일본 열도로 진출했다. 이어 신라와 고구려를 압박했다. 이에 더해 ‘요서 진출설’과 ‘양자강 유역 점유설’이 주장될 정도였으니 군수산업은 분명 활성화돼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환경과 국민정서, 오랜 문화전통으로 인해 문화가 발달했고, 문화정책에 힘을 더 기울인 듯하다. 차원이 다른 예술품 금동대향로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절터 유적에서 이를 확신할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됐다. 7세기 전반에 제작된 높이 62.5㎝, 무게 11.8㎏의 ‘금동대향로’다. 이 향로는 뚜껑, 몸체, 받침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받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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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찬란한 황금문화 꽃피우며 부국강병 이뤄내
광개토태왕이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으로 남진한 이후, 신라와 가야는 고구려의 기술을 습득해 비로소 기마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래서 부산의 복천동 11호분이나 함안의 말이산 고분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철제갑옷, 철제투구, 말투구, 말방울, 말갑옷 등의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뚫음무늬 금관신라를 ‘황금의 나라’라고 말한다. 아름답고, 뛰어난 금관들이 6점이나 발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황금의 나라는 고구려였다. 우리 조상은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금을 좋아했다. 《삼국지》에는 부여의 귀족이 금·은으로 모자와 옷을 장식했으며, 고구려인은 무덤에 부장품을 많이 넣어 금·은 같은 재물이 없어진다고 기록했다.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의 귀족이 저택과 모자 의복을 금·은·구슬로 치장하고, 금목걸이·금귀고리·금가락지 등의 장신구를 소유했다고 썼다. 또 무덤에서는 금동등자, 금동재갈, 안장, 금동화살촉 등이 출토됐다.그런데 고구려에도 금관이 있었다. 1941년에는 평양 진파리 6호분에서 ‘금동 해모양구름무늬 뚫음새김’ 장식품이 나왔다. 동명왕릉에서는 심엽형 보요와 금실 100여 점을 비롯한 금관 장식품이 출토됐다. 4세기 말~5세기 초 고분인 평양 용산리 7호 무덤에서 절풍 모양의 금동관이 출토됐다.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는 관테 둘레와 세움 장식이 하나로 이어진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이 출토됐는데, 청동 위에 아말감 도금을 했다. 당연히 수은을 채취해 정교하게 이용하는 화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손영종 《조선수공업사》). 광개토태왕릉에서 직경이 0.2㎜가 채 안 되고 표면에 요철 문양이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