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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워드 시사경제

    200개국 송금·결제 잇는 금융망…러시아 퇴출 당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해 서방국가들이 초강력 금융제재를 결정했다. 미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는 지난달 26일 공동성명을 내고 “러시아 일부 은행을 선별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배제하겠다”고 밝혔다. 일본도 이 조치에 동참하기로 했다. 스위프트 퇴출은 국가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어 이른바 ‘금융의 핵무기’로도 불린다. 스위프트가 대체 무엇이고, 경제 활동에 어떻게 엮여 있기에 이런 수식어가 붙었을까. 서방국 “스위프트에서 러시아 은행 배제”해외 송금을 해보면 거래할 은행의 스위프트 코드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스위프트는 세계 200여 개국 1만1000여 개 금융회사가 돈을 지급하거나 무역대금을 결제하는 데 활용하는 전산망이다. 매년 수조 달러가 스위프트를 통해 이동한다. 국제 결제대금의 절반 이상이 이 시스템을 이용하기 때문에 스위프트에서 빠지는 국가는 국제 금융시장에 접근이 제한된다. 무역, 외국인 투자, 송금 등에 직격탄을 맞는다. 이란과 북한은 스위프트에서 차단돼 있다.서방국들은 이번 조치로 러시아가 즉각적인 경제적 타격을 입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러시아 기업과 개인이 수출대금을 받거나 수입대금을 보내는 것을 비롯해 해외에서 대출받거나 투자하기가 힘들어진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러시아 은행들이 대부분의 금융거래를 하지 못하게 하고, 러시아의 수출입을 효과적으로 막을 것”이라고 말했다.다만 유럽 등 다른 나라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고, 세계 금융 시스템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

  • 커버스토리

    전쟁 위기 우크라이나 불안해진 '지구촌 경제'

    “유럽의 빵 바구니가 불에 타버릴 위기에 처했다.” 세계 3대 곡창지대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Ukraine)에서 전쟁이 날지 모른다는 소식입니다. 유럽 대륙 동쪽에 있는 이 나라는 세계 보리 옥수수 생산 4위, 밀 생산 6위를 차지할 정도로 큰 곡물 생산국입니다. ‘유럽의 빵 바구니’라고 표현할 만하죠! 비료를 주지 않아도 곡식이 잘 자라는 흑토(黑土·체로노젬)로 덮여 있다네요. 천연자원도 무진장 묻혀 있습니다. 철광석 매장량이 세계 1위, 석탄 매장량이 세계 6위입니다. 망간, 티타늄, 니켈, 흑연도 풍부합니다. 축복받은 땅인 거죠.자연 조건은 이렇지만, 국제 지정학적 조건은 축복과 거리가 멉니다. 유럽 강대국들이 틈만 나면 이 땅을 가지려 했습니다. 최근 들려오는 전쟁 위기 소식도 예외는 아닙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삼키려고 국경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어요.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대응군을 투입하는 중입니다. 일촉즉발(一觸卽發), 살짝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은 상태에 놓여 있어요. 전쟁이 난다면 코로나19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세계경제가 다시 위기에 빠질 수 있어요. 지구촌의 관심이 온통 우크라이나에 쏠려 있습니다.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 커버스토리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나

    우크라이나 국민은 요즘 밤잠을 설친다고 합니다. 전쟁 위협 때문입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삼키기 위해 곧 침공할 것이라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10만 명 이상의 병력과 포병·탱크부대를 접경지에 배치한 상태입니다. 군사력이 약한 우크라이나는 미국을 주축으로 한 서방국가들의 개입을 원하고 있습니다. 일촉즉발, ‘유럽의 빵 바구니’에 전운이 짙어지는 상황입니다. 왜 긴장이 고조되고 있나직접적인 원인은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NATO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9년 맺어진 군사동맹인데요. 유럽에서 1, 2차 세계대전 같은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국이 유럽 주요 국가를 한 동맹체제로 묶은 겁니다. 회원국들은 한 회원국이 비회원국의 공격을 받으면 자동으로 개입하게 돼 있어요. 처음엔 12개국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18개국이 더 가입했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NATO의 우산 속에 있는 게 안전하다는 것이죠.자유 진영과 대척점에 있던 소비에트연방(현 러시아)은 1955년 바르샤바조약기구를 결성했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과 함께 이 기구에 편입됐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밑에 있으면서 아픈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철권 통치자’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농업지대를 집단농장화하자 1932~1933년 대기근이 발생했습니다. 300만 명 이상의 우크라이나인이 굶어 죽었죠.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때를 홀로도모르라고 부르며 추모합니다. ‘기아로 인한 치사’라는 뜻이죠. 소련이 해체된 1991년 이전까지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

  • 경제 기타

    러시아, 세계 최초로 우주서 영화 촬영…배우·감독 태운 '소유스' 발사

    러시아가 세계 처음으로 우주에서 영화를 찍기 위해 지난 5일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배우 율리아 페레실드(37·왼쪽부터), 우주비행사 안톤 슈카플레로프(49), 영화감독 클림 쉬펜코(38)를 태운 ‘소유스 MS-19’ 우주선을 발사했다. 이들은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12일 동안 장편 영화 ‘도전’(가제)을 촬영하고 오는 17일 귀환할 예정이다. 미국도 배우 톰 크루즈가 미항공우주국(NASA)의 도움으로 ISS에서 촬영하기로 하는 등 우주가 인류의 일상적인 활동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러시아연방우주공사(로스코스모스) 제공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거란 공격에 한 달 못 버티고 전격적으로 무너진 발해…다양한 종족 구성에 잦은 임금 교체로 정치 혼란 거듭

    한 나라의 멸망은 하루아침에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오랜 기간 많은 신호를 보내지만 깨닫지 못한 채 당할 뿐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전쟁 등이 그랬다. ‘발해국’의 멸망을 화산 폭발 탓으로 돌리려는 사고는 수백 년 쌓인 관습적 오류일 따름이다. 전격적인 거란의 공격요나라의 황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발해국은 대대로 원수인데, 아직 보복을 완수하지 못했다”며 925년 윤 12월, 푸른 소(靑牛)와 흰 말(白馬)을 죽여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냈다. 예상을 깬 겨울작전을 펼쳐 부여성(지린성 농안)을 3일 만에 함락했다. 발해의 노상(老相)이 3만 명의 군대로 저항했으나 패했고, 요군은 수도인 홀한성(상경성, 헤이룽장성 닝안현)을 포위한 끝에 큰 전투 없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임금은 소복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은 채 신하들과 함께 엎드려 빌었다. 228년의 역사는 허무하게 끝났다. 임금인 대인선과 왕비는 요나라에서 ‘오로고(烏魯古)’ ‘아리지(阿里只)’로 불렸는데, 끌려갈 때 탔던 말의 이름이다.발해는 신비한 나라다. 건국도 극적이었지만 붕괴도 전격적이었고, 멸망 원인과 시기도 불명확하다. 또 ‘발해’와 ‘발해인’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역사에 등장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으며, 승병(勝兵)이 수만 명이고, 사방 5000리에 달한 영토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는 평가를 받는 발해는 왜 채 한 달도 못 버티고 멸망했을까? 역사가 후손에게 줄 유산은 ‘자랑’이 아니라 ‘교훈’이며, 남 탓이 아니라 제 탓을 하는 자세다. 한 달도 못 버틴 228년의 역사21세기와 마찬가지로 국제관계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당·신라와 전쟁·교류하며 동북아 강국이 된 발해, 요동반도에서 연해주 북부까지 영향력 뻗쳤다

    당나라의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2000여 리(里·800여㎞)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발해는 대부분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됐으며 온돌, 복식, 무덤과 축성 양식을 비롯해 제철 기술, 말 사육과 무역 등의 산업, 매사냥 등의 풍습 등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다. 연호를 사용하는 등 스스로 황제국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당나라 공격하며 강국으로 발돋움고왕(대조영)은 700년에 ‘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705년에는 당나라와 사신을 교환했다.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는 국제환경 속에서 당나라는 713년에 대조영에게 ‘발해군왕 홀한주도독(渤海郡王 忽汗州都督)’이란 지위를 줬다. 그런데 2대 무왕은 적극적으로 국제질서에 참여해 북으로는 흑수말갈, 서로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732년 9월, 장문휴가 거느린 함대는 압록강 하구인 박작구를 출항했다. 요동반도 남쪽 해양과 묘도군도를 경유해 전광석화처럼 산둥반도 북부에 상륙한 군대는 자사(지방 감찰관)인 위준을 죽이고 등주성을 점령했다. 한편 무왕은 육군을 거느리고 거란의 도움을 받아가며 요서지방을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이때 당나라는 남쪽에서 발해를 공격하도록 신라를 압박했으나, 733년에 출동한 신라는 폭설을 핑계 삼아 도중에 철군했다. 이 승리로 발해는 강국으로 발돋움했으며, 당은 738년 등주에 발해관(渤海館: 발해 사신이 머물던 숙소)을 설치해 발해 사신단 및 승려들의 방문과 무역에 협조했다.발해와 신라는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였으므로, 신라는 동북 변경에 장성을 쌓았다. 발해가 신라도(新羅道)를 개통했음에도 불구하고 790년과 812년에만

  • 과학과 놀자

    스텔스 기술의 핵심은 레이더파 흡수·차단…록히드 비밀연구소에서 시작, 걸프전에서 위력 입증

    탐지 기술과 스텔스 기술은 창과 방패다. 현대전에서 스텔스 기술은 탐지 기술의 발전과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다. 군사 기술에서는 소리, 빛, 열, 레이더 신호를 활용하여 적을 탐지하는 기술과 그런 신호 노출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노력 간의 경쟁이 치열하다. 스텔스 기술은 신호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한 매우 다양한 기술적 수단이 모여서 이뤄진 종합기술이다. 현대전에서 스텔스 능력의 보유 여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매스컴을 통해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스텔스 기술은 한글로는 ‘은폐 기술’로 해석될 수 있는데, 잘 보이지 않도록 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잘 보이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라고 해서 흔히 영화 ‘어벤져스’에 나오는 쉴드의 공중항공모함 헬리케리어의 능동위장 모드나 ‘해리포터’의 투명 망토와 같은 것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광학신호(가시광선)에 대한 은폐 기술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고, 실제 군사 기술에서는 가시광선뿐만 아니라 음파, 적외선, 레이더파와 같은 신호를 이용하여 탐지하는 기술과 그에 대한 은폐 기술이 종합적으로 다루어진다. 다양한 탐지 기술의 특성과 한계다양한 신호 중에서 수중에서 주로 사용되는 음파를 제외하고는 레이더파, 적외선 및 가시광선은 실은 모두 같은 전자파의 일종이다. 모든 전자파는 공기 중에서 빛의 속도로 전파되지만 주파수에 따라서 그 종류가 구분된다. 우리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빛은 약 430~790㎔(1㎔=1조㎐)의 주파수를 가지며, 적외선은 430㎔ 바로 아래 주파수 영역을 차지한다. 이에 비해서 레이더에 사용되는 전자파는 주로 1~40㎓(1㎓=10억㎐)의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백제 유민, 대한해협 건너 일본국 탄생에 큰 역할…일본 일왕가와 혈연관계 깊어지고 문화발전에 기여

    고당(高唐)전쟁에서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 유민들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신라로 망명해 대당(對唐)전쟁에 합류했던 부류는 신라인이 됐고, 북만주나 동만주 일대 오지로 탈출한 유민들은 거란·선비·말갈 등 방계종족들에 동화되고 말았다. 또 한 무리는 이미 진출해 교류했던 일본열도로 건너갔다.한편, 나라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고구려인들도 있었다. 이정기 일가는 청주, 서주 등 산둥반도와 장쑤성(江蘇省) 일대에 제나라를 세운 후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며 54년 동안 발전했다. 또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에서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성장했다. ‘보트피플’ 백제 유민 일본으로 건너가그럼 백제 유민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660년 8월, 실정과 오만으로 저항 한 번 못한 채 항복한 의자왕과 대신들 그리고 죄없는 병사들 1만2800명은 배에 실려 당(唐)으로 끌려갔다. 의자왕과 왕자들, 일부 대신은 당나라의 벼슬을 받았으나, 복국군의 임금으로 고구려로 망명했던 부여풍은 붙잡혀 영남(廣東·廣西지방)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산둥지역에 버려졌던 백성들은 다시 요동으로 이주당했다. 한편 주류성 전투와 백강(백촌강)해전에서 대패한 복국군은 “어찌할 수 없도다. 백제의 이름은 이제 끊어졌고, (조상)묘소에도 갈 수가 없구나…”(《일본서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