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week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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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vs 스파이더맨…소년을 꿈꾸게 한 슈퍼 히어로
슈퍼맨과 헐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배트맨과 스파이더맨이 붙으면 어떻게 될까. 어렸을 적 슈퍼영웅을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가졌을 법한 의문이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영웅이 되고, 악당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도를 꿈꾸기도 한다.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펴도록 만든 곳이 있다. 미국의 두 출판사인 DC와 마블이다. 슈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원더우먼…. 세계인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슈퍼영웅들이 이 두 출판사에서 만들어졌다. 최근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 슈퍼영웅들도 이들의 작품이다.◆DC가 연 슈퍼영웅 세상슈퍼영웅 만화의 세계는 DC가 열었다. 기병대 소령을 지낸 소설가인 맬컴 휠러니컬슨이 1934년 설립한 출판사 ‘내셔널 얼라이드’에서 시작했다. 이 회사는 처음에는 스포츠, 영화 뉴스, 공상과학 소설 등을 실은 잡지를 내놓았다. 이후 만화 산업이 커질 것을 예상한 휠러니컬슨은 ‘디텍티브 코믹스’라는 만화책 회사를 만들었다. 첫 슈퍼영웅인 슈퍼맨은 조 슈스터와 제리 시걸이라는 클리블랜드 출신의 10대 만화가들이 창조했다. 두 소년은 당시 인기가 있었던 탐정소설 등에서 영감을 받아 슈퍼맨 캐릭터를 만들었다. 이들은 1933년부터 여러 출판사에 슈퍼맨 만화를 보냈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이들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은 디텍티브 코믹스의 편집자였던 셸던 마이어였다. 슈퍼맨은 1938년 만화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과거에 없었던 캐릭터인 슈퍼맨은 단숨에 대중을 사로잡았다. 슈퍼맨 인기에 고무된 디텍티브 코믹스는 1939년에 배트맨, 1940년대에 샌드맨, 플래시, 호크맨, 그린 랜턴, 아워맨 등을 잇따라 내놓아 큰 성공을 거뒀다. 슈퍼맨, 배트맨, 플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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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용평가 양대산맥그들의 한마디에 세계경제 요동
‘국제금융시장의 저승사자.’ 국제금융시장에서 서슬퍼런 권력을 휘둘러온 신용평가사들을 일컫는 말이다. 도를 넘어서는 위세에 대한 비아냥도 녹아 있다. 최근엔 유럽 국가와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급격히 하향 조정해 위기를 증폭시켰다는 비난도 받는다. ‘세계경제의 파수꾼’ ‘갱도 안의 카나리아’라는 그동안의 찬사가 무색할 지경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무디스는 국제 신용평가업계의 양대 산맥이다. 이들 회사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야기한 미국 금융회사들의 위험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S&P와 무디스가 최근 ‘강성’ 신용평가 보고서를 쏟아내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세계 신용평가시장을 40%씩 양분하고 있는 이들 회사는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한치 양보없는 격전을 이어가고 있다.◆유럽 재정위기를 둘러싼 ‘신경전’작년 8월 미국의 신용등급이 갑작스레 강등됐다. S&P가 ‘한방’을 날린 것이다. 세계 금융시장은 쇼크에 빠졌고 증시는 요동쳤다. S&P가 이런 결정을 한 데에는 무디스와의 신경전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S&P가 시장점유율에서 무디스에 밀리자 ‘오버’를 했다는 것이다. 무디스는 자존심으로 대응했다. 미국의 신용등급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국가부채가 크더라도 경제 규모와 비교하면 감당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무디스는 설명했다. 상대방을 겨냥해 직격탄을 날린 적도 있다. S&P는 2010년 무디스의 신용등급을 ‘부정적 관찰대상’에 올렸다. 신용등급이 조만간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였다. 이유는 ‘미국의 금융규제 개혁 입법에 따라 신용평가사들의 비용이 늘고 수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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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포착한 브레송 vs 전쟁터 누빈 카파…사진에 '영혼'을 담다
1800년대 말 등장한 사진은 처음에는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카메라 크기가 줄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진은 서서히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 자리잡게 된다. ‘사진을 독자적인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노력과 ‘전쟁의 참상 등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노력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치열하게 진행된다. 이 같은 움직임의 최전선에 있었던 인물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로버트 카파다. 이 둘의 삶과 사진은 대조적이었다. 사진가들의 공동체를 함께 만들고 새로운 사진문화를 탄생시킨 동료이기도 했다.◆사진으로 美를 추구브레송은 1908년 프랑스 노르망디 샹틀루 지방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섬유회사를 경영했다. 맏아들인 브레송이 가업을 이어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파리에서 2년 동안 회화공부를 했고 초현실주의에 깊이 빠져들었다. 브레송은 그러나 화가로서 자신의 재능에 한계를 느꼈다. 현실에서 도망치듯 그는 1931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행 배에 올라탔다. 닥치는 대로 일했고 오스트리아 사냥꾼을 만나 사냥으로 생계를 잇기도 했다.그가 사진기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사냥을 하지 않을 때는 중고 카메라를 들고 나가 사진을 찍었다. 당시 그가 찍은 사진들은 ‘기록사진’이라기보다 독창적인 기하학적 구도를 강조하는 ‘초현실주의 예술’에 가까웠다. 그는 아프리카를 돌아다니다 풍토병에 걸려 죽을 뻔했고 1년 만에 프랑스로 돌아왔다.브레송은 마르세유에서 소형 라이카 카메라 한 대를 구입한 뒤 프랑스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1932년 파리에서 브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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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사랑도 영화처럼…그들에 의해 세상은 더 로맨틱해졌다
연인이 만나 하는 얘기를 영어로 ‘sweet nothing’이라고 한다. 달콤하지만 새겨들을 만한 얘기라고는 전혀 없는 ‘밀어(蜜語)’일 뿐이라는 비아냥거림이 깔려 있는 표현이다. 실제로 연인끼리 이뤄지는 대화의 90% 이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얘기’라는 분석도 있다.이런 연인 간 대화를 ‘영화의 한 장르’로 끌어올린 사람들이 있다. ‘로맨틱 코미디’를 만든 미국의 우디 앨런과 노라 에프런이 대표적이다. 얼굴은 예쁘지만 천방지축인 여성과 고집스럽고 까칠한 남성이 엮어가는 스토리는 지금은 흔해 빠진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35년 전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영화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애니홀’ ‘맨해튼’ ‘한나와 그 자매들’은 앨런의 작품이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은 에프런의 영화다.◆로맨틱 코미디 창시자 우디 앨런앨런은 1935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석세공사이자 웨이터였고 어머니는 식료품가게 직원이었다. 뉴욕의 중하류층 유대인이던 앨런의 부모는 다툼이 잦았다. 그는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앨런은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농담을 잘했던 그는 신문에 유머를 기고하는 에이전트에서 일하며 유머 한 편당 10센트에 팔았다. 이 일로 17살 때 부모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방송 대본도 쓰고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도 활동했던 그가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앨런은 “내 관심사는 오로지 사람들을 웃기는 것뿐”이라며 시나리오에서부터 출연, 감독, 기획을 모두 맡았다. 그의 초기 작품은 배우가 과장된 몸짓으로 연기하는 ‘슬랩스틱 코미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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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양키스 - 보스턴 레드삭스, 홈런왕 베이브 루스ㆍ핏빛 투혼 커트 실링…별들의 야구 전쟁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라이벌이다. 1932년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야구배트를 어깨 위로 치켜들어 먼 외야 관중석을 가리킨 뒤 담장 밖으로 공을 넘겨버린 베이브 루스(양키스)의 예고 홈런. 인대수술을 받은 상태로 월드시리즈 마운드에 올라 흰 양말이 레드삭스(빨간양말)가 되도록 핏빛 투혼을 보여준 2004년 커트 실링(레드삭스)의 역투. 전설의 포수 요기 베라를 기념하는 날에 데이비드 콘(양키스)이 1999년 기록한 퍼펙트 피칭. 이 모두가 양키스와 레드삭스의 영웅들이 만들어낸 야구사에 빛나는 장면들이다.○초기 강자는 레드삭스미국에서 야구는 180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대중 스포츠로 퍼져나갔다. 1845년 은행원 알렉산더 카트라이트 주도로 월스트리트 청년들이 ‘뉴욕 니커보커스’라는 최초의 야구팀을 만들었다. 이후 대도시를 중심으로 속속 야구팀들이 생겼다. 1871년에는 뉴욕, 보스턴, 시카고 등 10개 팀이 참가한 최초의 프로리그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이 탄생했다. 1876년에는 내셔널리그, 1901년에는 아메리칸리그가 각각 출범했다.레드삭스는 1901년 출범한 8개 아메리칸리그 팀 중 하나다. 1869년 만들어진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의 감독 헨리 라이트를 레드삭스가 영입하면서 팀의 애칭을 따 보스턴 레드삭스라는 명칭이 굳어졌다.양키스는 영국보병연대의 이름인 ‘하일랜더스’가 양키하일랜더스가 됐다가 양키스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메이저리그 초기의 강자는 레드삭스였다. 1903년 내셔널리그 우승팀과 아메리칸리그 우승팀 간 열린 최초의 월드시리즈에서 레드삭스는 피츠버그를 제압했다. 이후 20년 동안 네 번(1912, 1915, 1916, 1918년) 더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