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week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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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돈 풀면 가난 해결?…인플레이션을 몰랐던 살라스의 착각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인타임을 통해 본 '물가와 통화정책' 커피 한 잔에 4분. 버스비는 2시간. 스포츠카 한 대 59년. 2011년 개봉한 영화 ‘인타임’에서 시간은 곧 돈이다. 지폐와 동전이 모두 사라지고 시간만이 화폐가 된 세상. 사람들은 일해서 시간을 벌고 그 시간으로 밥도 먹고 물건도 산다. 주의할 점은 한 가지. 주어진 시간을 모두 다 쓰고 잔여시간이 0이 되는 순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시간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하루를 버틸 시간을 노동으로 사거나, 은행에서 빌리거나, 그도 안 되면 훔쳐야 한다. 주인공 윌 살라스(저스틴 팀버레이크 분)는 48시간 이상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는 ‘시간 가난뱅이’다. 하루 노동으로 하루 수명을 연장하는 그는 이른바 날품팔이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출근 때마다 점심값 30분을 슬쩍 챙겨주는 어머니(올리비아 와일드 분)뿐이다. 시간이 화폐인 세상 가상현실을 다룬 시나리오를 충실히 이행한 것이겠지만, 살라스를 포함한 영화 속 인물들은 시간을 화폐처럼 쓰는 데 어색함이 없다. 걸인은 “5분만 달라”고 구걸하고, 거리엔 ‘무조건 99초 상점(현실세계로 치면 1000원숍)’이 즐비하다. 살라스의 여자친구(어맨다 사이프리드 분)는 귀걸이를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24시간이 너무 적다고 투덜댄다. 반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보유 시간의 일정분을 떼어내 은행에 예금하고 이자 시간을 받기도 한다. 영화 속 시간은 화폐의 세 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다. 물건을 사고팔 때 쓰이며(교환의 매개), 물건의 가치를 표기하고(회계의 단위), 일정 시간을 보관했다가 나중에 쓸 수도(가치의 저장)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현실의 화폐보다 저장 기능이 떨어진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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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차가운 공공재에 판타지 입힌 영화적 상상력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7번방의 선물을 통해 본 공공재 서비스 성인이지만 6세 아이의 지능을 가진 지적장애인 용구(류승룡 분)는 자신의 하나뿐인 딸 예승(갈소원 분)에게 노란 ‘세일러문’ 가방을 선물하는 소박한 꿈을 갖고 산다. 마트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그의 한 달 월급은 고작 63만8800원. 그래도 용구는 차곡차곡 돈을 모은다. 마침내 가방을 사러 가던 날, 용구는 뜻밖에도 여아 유괴 및 성추행 살해에 대한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갇힌다. 1200만 관객을 울린 영화 ‘7번방의 선물’(감독 이환경)은 성남교도소 7번방에 수감된 용구와 같은 방 죄수 5명이 교도소 밖에 홀로 남게 된 예승이를 몰래 교도소 안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교도소 내 등장인물들은 처음에 흉악한 범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용구를 배척하지만 어린아이처럼 착한 그의 심성에 점차 마음을 열게 된다. 나아가 예승이가 교도소 안에 몰래 들어와 아빠와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용구는 끝내 사형 집행을 피하지 못한다. 용구가 사형장으로 떠나는 날은 공교롭게도 예승이의 생일. “아빠 저를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며 큰절을 올리는 예승이의 마지막 작별인사는 수많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냈다. 영화 속 7번방은 ‘허구’ ‘7번방의 선물’이 이처럼 감성코드를 자극한 배경에는 다소 미화된 교도소의 풍경도 한몫했다. 영화 속에 그려진 교도소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온화하다. 특히 7번방은 파스텔톤 색상으로 연출돼 마치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방은 볕도 잘 들고 6명을 수용해도 넉넉할 정도로 넓다. 이런 모습은 실제 교도소와는 차이가 있다. 2010년 9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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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합 막는건 정부의 역할"…한국 공정거래법에도 영향
1930년대와 1940년대 고전적 자유주의는 이념전쟁에서 완패했다. 독일의 민족사회주의(나치즘), 미국 루스벨트의 뉴딜, 소련의 공산주의 등 집단주의가 시대를 지배했다. 자유주의 패배의 이유가 무엇인가. 자유주의 이념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정책 때문인가. 당시 이 주제는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이었다. 결정적인 패배 이유가 고전적 자유주의 자체에 내재된 결함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23세의 어린 나이로 경제학 교수가 된 빌헬름 뢰프케다. 그는 19세기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봉건시대의 억압적인 신분 사회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켜 삶과 기회를 개선하는 등 인류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고전적 자유주의가 사람들이 견뎌내기 어려운 심각한 문제도 야기했다고 뢰프케는 비판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담합과 독점 형태의 사적 권력으로 자유가 유린된 것, 빈부 격차가 커지고 빈곤과 무산자가 증가했던 것, 인구 밀집으로 도시 주거환경이 열악해진 것 등 자본주의가 이런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념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자본주의의 그 같은 ‘병든’ 사회구조 때문이라고 질타했다.그렇다고 뢰프케가 집단주의를 찬양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독일 하노버의 한 평화로운 작은 마을에서 의사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그는 전쟁에 참가해 집단주의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던 터였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미제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그는 집단주의의 승리를 이성에 대한 폭동이자, 자유로운 열린 사회에 대한 철학적·도덕적 위협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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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집단에 포획된 정부, 그릇된 정책 내놔"…규제 폐단 지적
정부규제의 원인과 효과에 관한 연구로 198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는 아버지는 독일, 어머니는 헝가리 출신인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거시 분야의 밀턴 프리드먼과 나란히 미시 분야에서 시카고학파의 기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시카고대에서 프랭크 나이트 교수에게 배우고 익혔던 진리탐구의 소명의식 때문이었다. 스티글러의 사상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흥미롭게도 자유가 아니라 효율성이다.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이유도 경제자유가 아니라 효율성 때문이다. 시장경제를 모든 사람의 행동이 이미 상호 간 조정돼 더 이상 변동이 필요 없는 정지 상태인 ‘균형’으로 이해한 것도 특이하다. 그는 시장경제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1930년대 이후 미시경제학적 지식세계를 지배한 에드워드 챔벌린 등의 좌파사상과 싸웠다. 이 좌파사상의 핵심내용은 시장경제의 경쟁 조건은 불완전하고 독점적이기 때문에 정부가 대기업의 독점적 성향을 막기 위해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스티글러 역시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집중도가 높은 사적 독점력을 분쇄하고 담합한 기업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런 기업철학을 바꾸었다. 대기업 예찬론자였던 슘페터와 법경제학을 창시한 시카고대의 아론 디렉터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티글러 스스로가 연구한 대기업에 대한 계량적 통계적 분석 결과 때문이었다. 그는 경제력이 집중됐다고 해도 독점적 행동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질 좋고 값싸게 상품을 공급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시장지배적 기업이라고 해도 마치 ‘경쟁 상황에 처한’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독점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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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거노믹스 기반…美항공산업 규제 철폐…경쟁 촉발…요금 떨어져
스티글러가 살던 20세기는 시장에 의한 결과가 나쁠 때에는 언제나 국가가 나서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상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거기에는 두 개의 사상이 있었다. 하나는 거시경제학의 케인스 사상이었다. 시장경제는 고용과 성장에서 고질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빚을 내서라도 정부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시적 차원의 통화이론으로 그에 맞서 자유주의를 지킨 인물이 밀턴 프리드먼이다.다른 하나는 미시경제학의 챔벌린이다. 이는 소비자는 비합리적이고 조작당하기 때문에 대기업의 횡포를 막고 소비자의 후생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스티글러는 이런 좌파사상과 싸워 자유주의를 지켰다. 독점금지법을 자유기업의 마그나 카르타인 양 여기고 동시에 공익을 위한 법이라는 주장이 지배했다. 그러나 그는 전기요금과 신주 발행에 대한 규제, 최소임금제나 임대료 규제 등 그 어떤 것도 규제 목적을 달성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문제를 더욱 키웠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규제의 치명적 위험성과 시장의 우월성을 갈파했다. 그런 노력으로 스티글러는 한때 강렬했던 규제에 대한 열광도 식힐 수 있었다. 그의 사상이 꽃을 피운 것은 특히 1981년 레이건 행정부 시기다. 시카고 스타일의 법률가와 경제학자 다수가 독점금지 관련 부서에 동원됐다. 그들은 가격차별, 독점화, 수직적 결합을 금지한 현행 독점법의 집행도 자제했다. 레이건 시기 탈규제의 노력으로 전년도에 비해 규제당국의 공무원 수나 규제예산도 대폭 줄었다. 레이건 행정부 제1기에 정부 지출은 1.6%, 고용은 연평균 4.4%나 줄었다. 집권2기에는 지출은 연평균 3.8%, 고용은 0.6% 증가했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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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강의 기적' 일으킨 이론적 토대
발터 오이켄이 살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집단주의가, 인식론적으로는 역사주의, 실증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대안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 질서자유주의다. 그는 독일이 직면하고 있던 갖가지 경제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할 수 없는 역사주의의 무능함을 개탄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학파와 결별하고 시장이론의 중요성을 인식한 나머지 이론 개발에 진력했다. 사회주의는 자유를 박탈하기에 실패한 이념이라고 믿었다. 적자재정, 저금리, 신용확대를 통한 케인스의 완전고용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가격을 왜곡시켜 불황을 몰고 온다고 경고했다. 그에게는 제3의 길도 없었다. 각종 시장들은 상호의존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시장에 개입하면 그 시장뿐만 아니라 이와 대체관계 또는 보완관계에 있는 시장들까지도 왜곡을 초래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거대담론가였던 오이켄은 1940년대 초부터 독일 사회가 나아갈 길을 이론적, 정책적으로 모색했다. 그는 비밀리에 교수 및 대학원생들과 함께 법과 경제 그리고 질서사상과 관련해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 소식이 암암리에 알려지자 독일 전 지역에서 참석자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나치즘 비밀경찰의 수색과 압수, 감금 등으로 세미나를 지속하지 못했다. 나치즘이 끝나자 초미의 관심은 독일 사회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한 문제였다. 정치권과 사회 전체가 분열돼 방황했다. 독일 사회가 갈 방향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한 오이켄의 질서사상은 독일 사회의 혼란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프라이부르크학파’를 조직해 독일 경제를 친자유시장으로 개조하기 위한 운동의 전방에 서서 진두지휘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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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담합은 시장경제의 오류"…'제한된' 정부 개입 강조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은 아버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철학교수였고, 어머니가 화가였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개방적이고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집안에서 성장했다. 예나대학과 본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가정에서 다양한 일반교양을 습득했다. 이것이 장차 교수로서 용기와 책임의식이 강한 인물이 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오이켄이 살았던 시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비롯해 동유럽과 옛 소련의 사회주의, 독일의 나치즘,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등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시기였다. 대학의 지식층은 독재자와 전체주의 시류에 영합하는 등 도덕적 파산이 만연했다. 18~19세기 습득했던 자유 유산은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조만간 망할 것이 틀림없는 나치정권 이후 독일이 지향해야 할 경제질서를 새로 창안했다. 이것이 독일 번영을 상징하는 ‘라인강의 기적’의 이론적 토대가 된 ‘질서자유주의’다. 그 사상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는 자유다. 이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다. 자유 없이는 인간의 존엄성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라는 칸트의 절대윤리와도 상통한다. 오이켄은 전체주의의 폭정으로 잃어버린 자유에 대한 독일인들의 갈망을 대변했다. 흥미로운 것은 시장경제와 정부정책에 대한 비전이다. 그에게 자본주의는 자유와 번영의 원천이다. 자유기업 없이는 혁신도 없고 다양한 인간행동의 조정도 가능하지 않다. 시장경제는 가격 변화를 통해 경제적 상황 변동을 면밀하고 지속적으로 기록해 경제의 모든 부문들을 서로 조정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오이켄은 빈곤과 부의 격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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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개인행동의 결과"…경기변동이론으로 美대공황 설명
오스트리아 태생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중요하게 여긴 사회적 기본가치는 사유재산, 자유 그리고 평화다. 이들 가치를 가장 잘 실현하는 것은 번영의 원천인 자유시장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자유주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미제스의 평생에 걸친 과제는 사회와 경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체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주목을 끄는 것은 오스트리아학파의 전통을 이끈 미제스의 방법론이다. 그는 우리가 가격, 화폐, 시장, 법과 도덕, 관습 등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개인의 행동에서 출발해(개인주의), 그런 경제 현상을 개인들끼리의 상호작용 결과로 설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간 행동은 자신의 목표(동기)와 지식(인지)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 행동목표와 지식은 개인 각자에게 있어 고유하다는 의미에서 주관적(주관주의)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래서 인간을 다루는 경제학은 자연과학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미제스는 수리계량적 방법을 믿지 말라고 충고한다. 통계자료는 복잡한 인간 행동 과정의 역사적 흔적일 뿐, 이는 미래지향적인 인간 행동과 시장 과정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주관적인 기대는 말로조차 표현할 수 없는 암묵적 지식으로 구성돼 있다. 케인스의 소비함수처럼 총계변수는 ‘행동하는 인간’을 시장에서 퇴출시키고 총합변수가 마치 행동하는 것처럼 꾸며서 시장경제를 다루기 때문에 거시경제학은 과학이 아니다. 절반의 주관주의로 일관하는 균형론의 미시분야도 쓸모없다. 미제스의 자유시장 비전도 흥미롭다. 시장경제는 정확하게, 그리고 적시에 분업적 경제를 조정하는 데 필요한 모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