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weekend
-
미제스 사상의 힘…사회주의 비판해 주류학계서 냉대
미제스 사상은 사회주의, 케인스주의, 복지국가 등의 집단주의가 시대 정신으로 인식되던 시기에 등장했다. 그는 사회주의를 가장 통렬하게 비판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중 한 명이다.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손익계산에 필수적인 가격의 형성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며 결국 망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제스의 주장을 믿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슘페터는 순수한 논리로 보면 사회주의는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였던 새뮤얼슨은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기 몇 개월 전까지도 소련과 같은 사회도 번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군나르 뮈르달, 케네스 애로, 모리스 알레 등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도 사회주의를 그런 식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망했다.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미제스의 말이 적중했다. 미제스는 간섭주의도 유용한 체제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시장에 대한 간섭은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 때문에 또 다른 규제와 간섭을 불러온다고 지적했다. 간섭주의도 결국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제3의 길과 같은 중도(中道)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의 주장이 타당했다는 것은 스웨덴과 독일의 복지국가 정책 실패가 입증한다. 안타깝게도 미제스는 그의 경제학에 대한 공헌에 비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노벨상 수상자도 되지 못했고 심지어 주류학계는 그를 냉대했다. 미제스는 결코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오늘날 자유주의 이념이 살아 있는 것이 그의 불굴의 투지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21세기에 다시 인정받고 있다.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을 무릅쓰고라도 돈을 풀어야 한
-
'정부 실패론' 주창한 제임스 뷰캐넌, 자의적 권력의 유혹…'시장실패'보다 무서운 '정치실패'
케인스를 비롯한 주류경제학과 사회주의 등 모든 간섭주의 경제학은 시장이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탐욕적이라고 묘사한다. 반면 정치는 공공심에서 국민 행복(사회적 후생함수)을 위해 행동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정부 역할을 더욱 더 강화해야 인류가 ‘시장 실패’를 극복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난한 미국 남부 출신이라는 이유로 법적 차별을 겪어야 했고 기득권자의 독단적인 지배에 대한 혐오감을 안고 성장한 제임스 뷰캐넌(James M. Buchanan)은 인간 행동의 그 같은 비대칭적 시각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카고대학의 프랭크 나이트(순수이론 경제학의 수립자이자 자유시장경제를 주창한 시카고학파 창시자 중 한 명)로부터 학문적 자신감을 키운 그는 ‘시장 실패’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정치 실패’라고 주장하며 간섭주의 경제학을 흔들어댔다. 간섭주의 경제학이 얼마나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를 또렷이 보여주는 것은 잘 알려진 로마황제의 우화다. 내용은 이렇다. 두 가수는 서로 자기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다투다가 황제의 심판을 받기로 했다. 첫 번째 가수가 먼저 노래를 불렀다. 그가 노래를 끝내자마자 황제는 두 번째 가수의 노래를 들어보지도 않고 두 번째 가수에게 상을 줬다. 첫 번째 가수가 황제의 음악적 눈높이에 미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두 번째 가수는 음치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 우화에서 첫 번째 가수는 자유로운 시장 과정이고 두 번째 가수는 민주주의나 관료와 같은 정치 과정이다. 뷰캐넌이 이 우화를 통해 간섭주의 경제학자들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정치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더 이상 황제의 우(愚)를 범하지 말
-
인플레 허덕이던 칠레에 구세주로…스웨덴 연금 개혁, 이론적 토대 마련
프리드먼 사상은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이후 정부의 시장개입과 정부지출이 번영을 위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빚을 내서라도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사상이 지배하던 시기의 산물이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 자유가 경제적 자유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경제 자유는 제한해도 된다는 믿음이 지배했다. 프리드먼은 지칠 줄 모르는 토론과 다수의 통념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빈틈 없는 논리와 분명한 태도로 집단주의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그는 실로 ‘싸우는 경제학자’였다. 그의 화두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작은 정부를 내세워 정부간섭과 정부지출은 줄이고 시장에 최대한 자유를 주자는 것이었다. 대공황의 원인에 대해서도 프리드먼은 케인스와는 달리 유효 수요의 부족이 아니라 잘못된 통화정책, 구체적으로 말해 통화 축소 때문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이론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배척당하거나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학계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굽히지 않고 작은 정부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시카고학파를 형성, 이념전쟁의 전선을 다져나갔다. 프리드먼의 사상은 1970년대 말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을 야기한 케인스주의가 버림받는 순간이었다. 1980년대 들어 그의 자유시장론은 ‘작은 정부와 감세’로 요약되는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그의 사상적 영향은 미국 사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국제적이었다. 1980년대 후반 자오쯔양(趙紫陽) 중국 총리가 자국의 개혁과 개방에 확신을 갖게 된 것도 그의 조언과 격려 덕분이었다.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의 단일 소득세율 도입, 스웨덴이 공적연
-
'작은 정부론' 선도한 밀턴 프리드먼 "공짜 점심은 없다"…레이거노믹스·대처리즘으로 꽃 피워
밀턴 프리드먼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해도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을 들으면 그의 사상을 짐작할 수 있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그의 말은 고전적인 명언이다. 요즈음 정치권이 쏟아내고 있는 ‘무상급식’ ‘무상보육’ 등의 정책이 터무니없음을 말해준다. 정부와 관련된 명언이 흥미롭다. “임시로 정부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말을 믿지 말라.” “사하라 사막의 관리를 정부에 맡겨보라, 아마도 5년 안에 모래가 바닥날 것이다.” “정부는 최상의 종이와 잉크를 사용하지만 그 결과는 쓸모가 없다.” “경영이 어려워지면 기업은 구조조정을 통해 규모를 축소하지만 정부는 기구를 더 늘린다.” 말하자면 정부를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케인스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엘리트의 세계에서 성장한 엘리트 중 엘리트였던 케인스는 정부는 늘 자기 곁에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정부가 매우 우호적으로 보였을 터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프리드먼에게 정부는 심리적으로 멀리 있고 자기와 상관도 없는 것으로 생각돼 정부를 의구심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식당에서 일하면서 어렵게 공부해야 했던 미래의 경제학자에게 가까이 있었던 것은 매일매일 먹여주고 자수성가를 가능하게 한 시장바닥이었다. 그래서 자유시장에 대한 그의 비전이 우리의 흥미를 끈다. 자유시장은 번영의 거대한 엔진이며 빈곤과 억압으로 신음하는 세계의 희망이라는 것이다. 자유시장이 보장된 곳에서만 자유와 평등이 보장될 수 있으며, 규제와 간섭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빈익빈 부익부가 만연하고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그의 논리
-
자유주의자들 모아 1947년 이념전쟁 결의…베를린 장벽 무너지자 "거봐, 내가 뭐랬어!"
하이에크 사상이 나온 시대는 칼 포퍼가 말한 대로 열린사회의 적들이 가득한 절망의 시기였다. 20세기 전반 이후 동유럽과 소련을 점령한 공산주의와 서구를 지배한 케인스주의로 자유와 시장경제는 세상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하이에크는 인류가 ‘노예의 길’을 가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1947년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의 몽 펠르랭으로 자유주의 학자들을 불러 이념 전쟁의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외톨이 경제학자들의 모임’이라는 슘페터의 조롱만 들어야 했다. 더욱이 1970년대엔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개인 복지를 책임져야 한다는 복지국가 이념이 ‘케인스 망령’과 함께 인류를 빈곤으로 몰아갔다. 이때쯤엔 하이에크도 이념 전쟁에 지쳐 있었고 나이도 들었다. 세상은 그가 말한 것을 진지하게 들어주지도 않았다. 고향 빈에 돌아온 그는 우울증에 빠졌다. 세상이 야속했다. 그 무렵 놀라운 행운이 따랐다. 1974년 하이에크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우울증은 사라지고 생기를 되찾았다. 당시 스태그플레이션이 세계경제를 강타하고 있었다. 케인스주의가 엉망으로 만든 세상을 구할 자가 필요했다. 세계의 눈은 하이에크에게 쏠렸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그를 등에 업고 ‘경제혁명’에 나셨다. 규제를 혁파하고 조세 부담을 줄였다. 정부 돈줄도 묶었다. 결과는 전대미문의 번영으로 나타났다. 물가가 잡히고 고용과 소득도 급증했다. 하이에크가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혁명의 물결은 호주를 거쳐 동유럽으로 향했다. 하이에크가 공산주의는 필연코 망한다는 주장을 펼쳐왔던 지역이다. 1990년 결국 망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프
-
"富의 원천은 정부 아닌 시장"…덩샤오핑에도 한 수 가르쳐
○ 한국경제신문이 시대를 꿰뚫어본 경제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시리즈를 매주 토요일자에 게재합니다.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현실과의 관련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경제사상의 흐름을 다양하게 살피기 위해 자유주의·반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삶을 함께 소개할 예정입니다.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자유의 대변인’이라고 칭송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오스트리아 빈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커리큘럼이 자유로워 법학은 물론 경제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공부할 수 있었다. 박사과정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청소년기에는 심정적 사회주의자였지만 은사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를 통해 확고한 자유주의가 된 하이에크는 경기변동이론부터 시작했다. 경기불황은 신용의 과잉팽창으로 야기된 인위적 붐의 불가피한 현상이며 왜곡된 생산구조가 정상화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할 과정인데, 이때 불황의 해법으로 정부지출이나 통화를 늘리면 그 과정이 치명적으로 방해받는다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에 공감한 런던대는 1931년 ‘케인스의 물결’(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이론)을 막기 위해 하이에크를 불렀다. 그러나 순수경제이론 연구는 하이에크에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좁은 경제학으로는 이념 전쟁에서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데 불충분했다. 그의 경제학은 심리학 철학 법학 윤리학 등 학제융합적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심오하고 원대하다. 하이에크가 우리에게 준 자유주의 유산은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이
-
'한경 오픈 NIE 강좌' 취업준비생에 인기 짱!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완화가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벽을 낮춘다고 해서 부동산 시장이 활성화된다고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사고입니다.”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 때문에 사람들이 대형 마트(SSM)를 선택하는 걸 법으로 규제한다는 건 구시대적 발상입니다.” 한국대학생경제포럼(KUSEF)이 주최하고 한국경제신문이 후원하는 ‘이코노믹 리더 앤 리더(ERL·Economy Reader & Leader)’ 11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대학생들이 토론 과정에서 나눈 얘기다.ERL은 대학생들이 모여 신문을 활용해 경제 이슈를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올바른 경제지식을 갖도록 하자는 목적에서 진행하는 한국경제신문의 오픈 NIE(신문을 활용한 교육) 강좌다. 2009년 3월 처음 강좌가 시작된 이래 경제지력과 최신 경제이슈에 대한 안목을 길러 취업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평가가 확산되면서 참여 대학생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지금까지 11회에 걸친 프로그램에 2000여명이 참여했다. 초기엔 수도권 지역 대학생 중심이었으나 최근엔 부산 대구 대전 광주지역 대학생들도 온라인을 이용한 실시간 강좌 및 토론을 통해 ERL에 참가하고 있다. 이들은 1주일에 한 번 모여 3시간씩 공부한다. 프로그램은 강의와 토크 콘서트, 한국경제신문이 시행하는 국가공인 1호 경제이해력검증시험인 테샛(TESAT) 특강으로 짜여져 있다. 강사는 한국경제신문의 논설위원과 연구위원, 전문기자 등이다. 1기당 8주 안팎의 강의가 진행되며 단체로 테샛에도 응시한다. 강좌를 모두 이수하면 이수증을 준다.지난 7~8월 진행된 11기 ERL에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시장경제를 대체할 체제가 있는가’(정규재 논설실장), ‘중국 이해’(조주현 논설위원), ‘증권
-
보잉-록히드마틴, 민항기 공룡 vs 전투기 강자…하늘을 제패한 영웅
1903년 12월17일 오전 10시35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키티호크 해안.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던 오빌과 윌버 라이트 형제는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라이트 플라이어호’는 첫 비행에서 12초 동안 36m를 나는 데 성공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 성공 이후 항공기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수백명을 실은 제트 여객기가 5대양 6대주를 수없이 넘나들고 있다. 전투기는 1944년 독일에서 제트엔진을 첫 장착한 ‘1세대’ 메서슈미트Me262 개발에 이어 초음속 비행 능력을 갖춘 2세대, 고성능 다목적 레이더와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을 갖춘 3세대, 중거리 미사일을 운용할 수 있는 4세대, 스텔스(은폐) 기능을 갖춘 5세대로 발전해갔다. 세계 항공기산업 발전을 주도한 회사는 보잉과 록히드마틴이다. ‘인류의 첫 비행’에 매료된 사람들이 항공기 제작에 뛰어들었다.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전 세계 항공산업과 미국 군수산업의 두 축을 만들어냈다. ◆1916년 탄생한 두 회사보잉의 전신은 1916년 7월 윌리엄 보잉이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 세운 ‘태평양항공기제작회사’다. 보잉은 독일인 출신 미국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1903년 시애틀에서 목재회사를 인수해 큰 돈을 벌었다.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성공한 보잉은 1909년 미국에서 열린 첫 에어쇼에서 ‘하늘을 나는 물건’을 본 이후 생에 전환기를 맞는다. 보잉은 당시 국제적 명성을 누리고 있던 라이트 형제를 찾아가 비행기를 타보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낙담하지 않고 매사추세츠공대(MIT) 졸업생 등 인재를 영입해 비행기 동체와 날개를 직접 만들었다.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