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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정의는 도움을 청하는 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용기…경청과 연민 없는 정의는 자칫 폭력으로 변질되죠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그 다른 무엇을 ‘문화(文化)’라고 부른다. 문화란 향기 나며 유유자적하는 한 그루 나무를 가꾸는 과정이다. 누군가 오래전에 토양에 맞는 품종을 골라 씨앗을 정성스럽게 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줬다. 그리고 바람, 비, 안개, 공기와 같은 자연의 섭리를 간구하고 자연의 혜택을 입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가지를 치고 병충해에 시달리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기다린다. 그러면 가장 적절한 순간에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래서 고귀한 꽃을 피운다.복수동태법(復讐同態法)인간은 이런 문화를 위해 도시라는 인위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달리 제한된 공간을 구획하고 그 안에서 살면서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맺어 상부상조하는 것이 문화를 구축하는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조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 즉 ‘도시라는 공간에서 사는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도시의 규율을 준수하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그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지만, 자신의 직계 가족과 친족뿐만 아니라 자신과 상관없는 다른 가문, 이방인, 외국인들과 공존하려는 수고를 통해 인간이 된다. 가족과 친족이라는, 자신에게 익숙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관습과 습관이 삶의 유일한 잣대로 여기는 인간들은,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사실 동물이나 다름없다. 그들에겐 문화가 없다.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한 이방인은 그것을 ‘정의’라고 선포했다. 그의 이름은 ‘함무라비’다. 함무라비는 바빌론 도시 한복판에 가로 225㎝, 세로 55㎝의 현무암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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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아름다움은 다름을 수용하는 관용에서 나와…아리스토텔레스는 ‘공포’와 ‘연민’을 비극의 목표로 봤죠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나의 눈길을 끌고 숨을 멎게 할 만큼 매력을 발산하는 대상의 기준은 무엇인가. 인류 모두에게 적용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존재하는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아름답다’고 정의하고, ‘그렇다’고 교육받아 온 그것이 아름다운가? 서양은 18세기 중반 고대 로마의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재발견하면서 ‘신고전주의’를 시작했다. 신고전주의는 당시 장식과 비조화, 신의 은총을 강조했던 바로크와 로코코 형식에 대항해 르네상스와 고대 그리스의 예술을 모체로 삼았다. 조화와 비율, 일치는 신고전주의의 문법이다.숭고18세기에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와 더불어, 그 신고전주의가 숨 쉴 수 있는 ‘틈’들도 유럽인들 어휘에 등장했다. 천재성, 상상력, 취미, 정서, 감정, 즉흥과 같은 단어들을 통해 새로운 개념의 아름다움이 등장했다. 천재성과 상상력은 창작자의 능력을 표시하고 취미, 정서, 감정, 즉흥은 창작자가 어떤 대상에 느끼는 사적이며 시적인 능력을 시사한다. 이 용어들은 작품이 지닌 객관적이고 수학적인 특징들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사적인 태도들이다.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닌 내재적인 가치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관찰자의 반응이다.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을 ‘완벽한 형태를 추구하는 불안정한 연습과정에 대한 재현’이라고 정의했다. 무대 위에 선 배우의 말과 행동은 단호하고, 수단과 목적이 하나가 되며 압도적이어야 한다. 그 평가는 비극을 보는 아테네 관객들의 정서적인 반응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표를 ‘공포’와 ‘연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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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로노스 주민들, 오이디푸스 얘기 들으며 마음 열어…대화는 경청 통해 타인의 입장을 숙고하는 훈련이죠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눈물로 가득한 연못’이란 장면이 등장한다. 앨리스는 잠시 잠이 들어 깊은 구덩이에 빠졌는데 출구를 찾지 못해 한참 운다. 앨리스는 몸 크기가 작아져, 자신이 흘린 눈물이 만든 연못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그때 생쥐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나타난다. 앨리스가 말을 건다. “오, 마우스(생쥐)여. 이 연못을 나가는 길을 아니? 여기서 헤엄치는 것이 너무 피곤해. 오, 마우스여!” 앨리스는 생쥐를 부를 때 ‘마우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쥐에게 말해 본 적이 없었지만 오빠의 라틴어 문법책에서 ‘마우스’에 대한 격(格)변화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우스, 마우스의, 마우스에게, 마우스를, 오 마우스여!’앨리스와 생쥐의 대화생쥐는 앨리스를 한참 쳐다본 후, 조그만 눈으로 윙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앨리스는 생쥐가 영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엔 프랑스어로 말을 건넸다. 윌리엄 1세가 11세기 영국을 정복하러 이주했을 때, 그 생쥐도 함께 왔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윌리엄 1세가 거의 1000년 전 사람이란 사실을 몰랐다. 앨리스는 프랑스어를 배울 때 외운 첫 문장을 생쥐에게 말했다. “우 에 마 샤트(Ou est ma chatte)?” “고양이가 어디 있지?”라는 뜻이다. 그러자 생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에서 나와 공포에 질려 온몸을 떨었다. 앨리스는 말한다. “미안해. 나는 네가 고양이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어.”생쥐는 앨리스에게 묻는다. “네가 나라면 고양이를 좋아하겠어?” 앨리스는 자신이 키우는 ‘디나’라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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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명암·선악 등 서로 대립적인 두 항의 짝으로 구성…배움이란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다름에 대한 존경이죠

    내가 삶의 기준으로 삼을 옳은 것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그름은 무엇인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가. 어디가 지옥이고 어디가 천국인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인가. 누가 스승이고 누가 학생인가. 배움이란 자신이 우연히 던져진 환경의 관습이나 도덕이 나에게는 ‘옳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배움이란 내가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수많은 ‘다름’에 대한 존경이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세계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무식(無識)에서 탈출할 수 있다.두 도시 이야기《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시민들에게 묻는다. 작가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과거를 상징하는 테베의 문명을 아테네 근교에 있는 콜로노스에서 구축하려는 새로운 문명과 대비시킨다. 이 비극은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부랑자이며 방랑자인 오이디푸스를 당시 아테네 시민들이 구축하려는 새로운 도시문명 안으로 수용하려는 과정이다.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불우한 과거를 상징하는 테베에서 추방돼, 새로운 도시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애쓴다. 그는 자신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자비로운 도시’를 찾는다. 이 비극을 이해하는 열쇠는 이 두 도시가 상징하는 가치들에 대한 대비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처한 불쌍한 운명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눈먼 아버지와 낯선 땅으로 들어갈 참이다. 오이디푸스가 안티고네에게 건네는 말로 비극이 시작된다. “눈먼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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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 민주주의 뿌리는 다름을 수용하는 자비와 경청…이방인을 보호하고 수용할 때 도시가 새롭게 태어나죠

    오이디푸스는 도시라는 공동체가 지탱하기 위한 원칙을 위반(違反)했다. 도시는 가족의 집합이며, 가족은 부모 자녀라는 독립적인 위치와 기능의 집합체다. 가족의 해체는 곧 도시문명의 해체로 이어진다. 가족의 기반을 흔드는 가장 근본적인 해악은 가족 구성원의 경계를 침범하는 폭력(暴力)이다. 그는 이성적인 인간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오이디푸스는 그를 덮친 운명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조금씩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인간이 됐다.운명의 암호자비로운 여신들이 인간의 기준으로 상반된 가치를 지닌 존재인 것처럼 오이디푸스의 삶도 저주인 동시에 축복이 될 수 있다. 아테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콜로노스에서 다시 저주를 받아 추방될 위기에 처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반전시킨다. 그는 자신이 침입한 낯선 장소가 “자신의 운명의 암호”라고 확신한다. 그는 자신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 있게 분노의 여신들에게 요구한다. “그분들이 탄원자를 자비롭게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제 여기 이 자리를 절대로 뜨지 않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행한 삶에 얽혀 있는 실타래와 같은 암호를 새로운 문명의 구축을 위해 풀기 시작한다.‘탄원(歎願)’이란 한 사회의 통념이나 관습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숙고할 뿐만 아니라 그 해결책을 마련하도록 요구하는 행위다. 오이디푸스는 자신과 같이 금기시된 인간을 아테네라는 도시문명의 언저리인 콜로노스 안으로 수용하라고 요구한다. 그는 장님이며 허약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콜로노스 공동체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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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인은 '패륜아' 오이디푸스를 관용으로 용서하죠…관용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어요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그가 사망한 해인 기원전 406년 완성됐다. 기원전 401년 아테네 비극 경연인 디오니시아 축제에서 초연됐다.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 왕》《안티고네》와 함께 소포클레스의 ‘3대 테베비극’으로 불린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왕으로 치리(治理)하던 테베에서 떠난다. 그는 옷핀으로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됐다. 수많은 사람을 이끌던 왕이 이젠 발 한 걸음도 누구의 도움 없이는 옮길 수 없다.오이디푸스는 딸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아테네 근처에 있는 마을 콜로노스에 도착한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를 왜 이곳으로 이주시켰을까.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아테네 관객들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을까.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비극적인 운명에 굴하지 않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찬양이다. 소포클레스가 이 작품을 쓴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선 먼저 《오이디푸스 왕》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비극 작품이 쓰이고 상연된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의 철학을 파악해야 한다. 이 두 비극 작품의 주인공은 분명 오이디푸스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개성(個性)은 두 작품에서 다르다. 《오이디푸스 왕》은 영웅이 오만으로 명성과 권력을 잃는 비극적인 과정을 다뤘다. 반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더 이상 불행할 수 없는 한 인간이 어떻게 신적인 인간으로 부활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스인들에게 인간만큼 흠모할 만한 기적은 없다. 사실 그리스 비극 작품들은 불운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개성을 지키려는 인간의 숭고함을 감동적으로 전한다.용서소포클레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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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선악과 이야기는 오히려 인간의 독립선언인 셈이죠…오이디푸스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 지려고 스스로 장님 됐어요

    나는 자유로운가? ‘자유(自由)’는 타인의 임의적인 의지와는 상관없는, 독립적인 어떤 것이다. 자유는 타인을 통해 내 생각과 말, 행위가 영향을 받고 결정되는 ‘속박(束縛)’과 대조된다. 노예는 타인의 의지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자유인은 사회가 규정한 법을 어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이 선택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영국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1906~1997)은 ‘자유의 두 개념’이란 글에서 자유를 두 종류로 구별한다. ‘부정적 자유’는 외부의 압박이나 간섭이 없는 행동이다. ‘긍정적 자유’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자유를 이른다.자유의지자유와 밀접하게 관계된 단어가 자유의지다. 그(녀)는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미리 숙고하고, 그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상상한다. 자유의지는 절제의 힘으로 균형을 잡는다. 예를 들어 내가 오늘 아침 개와 산책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산책이 가져다 주는 개의 건강과 기쁨이 내게도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는 개와 산책한다. 자유는 한 개인의 깊은 생각과 그 생각을 실행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옮겼을 때 동반되는 다양한 결과를 감수할 때 생성된다.《창세기》에 등장하는 소위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숙고다. 최초의 상징적 인간들인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으로 상징되는 지식(知識)의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 먹는다. 이 행위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기초해 한 행위다.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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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치명적이고 운명적인 결함 지녔죠…그러나 스스로는 그결함을 알지 못해 길 못찾고 방황하죠"

    유인원이었던 인간이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한 시기는 약 350만 년 전이다. 오늘날 동아프리카에 거주하던 일부 유인원이 네 발로 걷는 짐승에서 시작해 두 발로 걷는, 소위 ‘이족보행’하는 유인원으로 진화했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즉 ‘직립원인’이다. 호모 에렉투스는 네 발로 걷고 뛰는 짐승들과 비교해 힘이나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진술(陳述)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를 살인자라고 폭로하자, 오이디푸스는 그 사실을 완강히 거부한다. 상대방의 진술을 인정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그 진술은 진위를 떠나 항상 거짓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코린토스를 떠나 테베에 정착해 왕이 됐기 때문에 자신이 라이오스(아버지)의 살해자가 될 수 없다고 단정했다.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는 대화한다. 대화는 상대방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는 연습이다. 이오카스테는 라이오스가 받은 신탁의 내용을 알려준다. “그이(라이오스)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손에 그이가 죽게 되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남편 라이오스는 마차를 타고 가다가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어느 날 도둑들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태어난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 라이오스가 아이의 두 발을 함께 묶은 뒤 하인을 시켜 인적이 없는 산에 내다 버렸습니다.”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진술을 들은 후, 자신이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진실일 수 있다는 개연성에 그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테베로 오기 전, 어떤 장소에서 낯선 자를 살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