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박사의 인문학 산책 -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9) 책임
나는 자유로운가? ‘자유(自由)’는 타인의 임의적인 의지와는 상관없는, 독립적인 어떤 것이다. 자유는 타인을 통해 내 생각과 말, 행위가 영향을 받고 결정되는 ‘속박(束縛)’과 대조된다. 노예는 타인의 의지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자유인은 사회가 규정한 법을 어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이 선택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영국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1906~1997)은 ‘자유의 두 개념’이란 글에서 자유를 두 종류로 구별한다. ‘부정적 자유’는 외부의 압박이나 간섭이 없는 행동이다. ‘긍정적 자유’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자유를 이른다.
자유의지
자유와 밀접하게 관계된 단어가 자유의지다. 그(녀)는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미리 숙고하고, 그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상상한다. 자유의지는 절제의 힘으로 균형을 잡는다. 예를 들어 내가 오늘 아침 개와 산책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산책이 가져다 주는 개의 건강과 기쁨이 내게도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는 개와 산책한다. 자유는 한 개인의 깊은 생각과 그 생각을 실행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옮겼을 때 동반되는 다양한 결과를 감수할 때 생성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소위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숙고다. 최초의 상징적 인간들인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으로 상징되는 지식(知識)의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 먹는다. 이 행위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기초해 한 행위다. 인간은 이 행위를 통해 우주와 자연의 이치인 ‘지식’을 깨닫는다. 4세기 로마 신학자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취한 사건을 ‘원죄’라고 해석했다. 이는 후대 그리스도교의 교리 근간이 됐다. 그러나 선악과 이야기는 오히려 인간의 독립선언이다. 인간은 스스로 선악과를 취함으로써 독립적이며 책임을 지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됐다.
책임
오이디푸스는 비극적인 사건들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추적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비극을 운명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조금씩 인식한다. 그는 아폴로신이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와 어머니 이오카스테에게 내린 예언과 자신에게 부과한 엄중한 신탁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유로운 자다. 그는 자신이 치리하는 테베와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키타이론 산에 버렸다는 목동을 찾아 대화한다. 목동은 자신이 테베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의 갓난아이를 키타이론 산에 버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 아이가 부모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마침내 테베에 역병을 가져온 장본인이 자신이란 사실을 깨닫고 애통하게 외친다. “아아, 모든 것이 신탁대로 이뤄졌구나.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햇빛이여! 내가 당신을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어머니 이오카스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아내 이오카스테)과 결혼해 죽여서는 안 될 사람(아버지 라이오스)을 죽였구나!”
장님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일들을 운명으로 돌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는 스스로 장님이 된다. 이 광경도 이오카스테의 자살처럼 무대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관객들은 전령의 연설을 통해 오이디푸스의 눈 자해 소식을 듣는다. “그분(오이디푸스)께서는 왕비(이오카스테)를 보자 큰 소리로 울부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왕비께서 매달려 있던 밧줄을 푸셨습니다. 가련하신 마님께서 바닥에 누우시자, 이번에는 보기에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분께서 마님의 옷에 꽂혀 있던 황금 브로치를 뽑아 드시더니 자신의 두 눈을 푹 찌르셨습니다.” 이로써 오이디푸스는 테베인들에게 자신이 테베를 오염시킨 장본인이란 사실을 드러냈다.
오이디푸스는 이제 자신의 무지에 관해 스스로 책임질 행동을 감행하며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이제 너희들은 내가 겪고 있고, 내가 저지른 끔찍한 일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너희들은 봐서는 안 될,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봤으면서도, 내가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어둠 속에서 지내도록 하라!” 오이디푸스는 이 애가를 부르며 어머니의 옷에서 빼낸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여러 번 찌른다. 그가 찌를 때마다 피가 흘러내려 그의 수염을 적신다.
오이디푸스가 마침내 무대로 등장한다. 그는 장님이다. 이전에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장님이었지만 육체적으로는 눈이 멀쩡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개안(開眼)했지만, 육체적으로 장님이다. 오이디푸스는 더 이상 테베의 왕이 아니다. 그는 더 이상 인간도 아니다. 그는 하찮은 물건이 됐다. 그는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자신에게 책임을 물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오이디푸스가 처한 운명에 함께 울었다. 오이디푸스의 다양한 면모를 표현할 그리스 단어가 있다. ‘아고스(agos)다. ‘경외·존경’ ‘오염·저주’ ‘희생양’ ‘거룩’의 의미를 지닌 단어다. 초라한 모습으로 오이디푸스는 퇴장한다.
■기억해주세요
《창세기》에 등장하는 소위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숙고다. 최초의 상징적 인간들인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으로 상징되는 지식(知識)의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 먹는다. 이 행위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기초해 한 행위다. 인간은 이 행위를 통해 우주와 자연의 이치인 ‘지식’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