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김종해 시인 : 1941년 부산 출생. 1963년 <자유문학> 신인상,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인간의 악기> <신의 열쇠> <항해일지>
<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풀> <봄꿈을 꾸며> <눈송이는 나의 각을 지운다> <늦저녁의 버스킹> 등 출간. 한국시협상, 공초문학상, PEN문학상 등 수상.
한때 메가박스 전국 367개 극장에서 하루평균 2200여 회(한 상영관에 하루 6회) 관객과 만났던 시입니다. 영화 상영 직전에 화면 자막으로 소개되면서 온라인 검색창을 연일 달궜죠. 이 시는 극장에서 활자와 영상의 멋진 하모니를 보여줬습니다. 메가박스가 광고 시간의 일부를 공익용으로 활용하는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캠페인을 펼친 덕분에 주요 관객인 20~30대가 시의 향기에 푹 빠질 수 있었지요. 극장 밖에서는 제주 우도와 전남 완도 타워, 서울 북한산 둘레길, 지하철역 스크린도어 등에서 수많은 독자와 만났습니다. 이안삼 작곡의 성악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지요.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시의 내용처럼 우리 삶에는 파도치고 바람 부는 날이 많습니다.
그럴 때 시인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오늘 일을 잠시라도/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사랑도 그와 같으므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러면서 “사랑하는 이여/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추운 겨울 다 지내고/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며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이 마지막 부분이 시의 백미입니다.
시인은 ‘파도’와 ‘바람’, ‘겨울’로 상징되는 인생의 고난을 ‘상처받은 사랑’으로 치환하면서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함께 전합니다. 그 희망의 상징이 곧 봄이지요.
<봄꿈을 꾸며>라는 시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이유를 “살구꽃, 산수유, 복사꽃잎 눈부시게/눈처럼 바람에 날리는 봄날이/언덕 너머 있기 때문”이라며 “한평생 살아온 세상의 봄꿈이 언덕 너머 있어/기다리는 동안/세상은 행복했었노라”라고 노래합니다.
김종해 시인은 동생 김종철 시인과 더불어 ‘형제 시인’으로 불립니다. 여섯 살 아래의 김종철 시인(2014년 작고)은 1968년 한국일보와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출판사 문학수첩을 설립하고 시 계간지 <시인수첩>을 창간했지요. 출판사 문학세계와 시 계간지 <시인세계> 발행인인 형에 이어 두 사람 모두 한국시인협회장까지 지낸 이력이 남다릅니다. 김종해 시인의 큰아들 김요일은 시인, 작은아들 김요안은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니 대를 잇는 문인 가족이기도 하지요. 내 몸은 온갖 감정과 영혼을 담은 악기팔순이 넘은 시인은 2019년 열두 번째 시집 <늦저녁의 버스킹>을 펴내며 “사람의 몸이 온갖 감정과 영혼을 담은 악기(樂器)”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습니다. 그의 시에는 오랜 경륜과 깊은 사색의 결실이 담겨 있지요. 다음 시 한 편도 빼놓을 수 없는 절창입니다.
“하늘에 길이 있다는 것을/새들이 먼저 안다/하늘에 길을 내며 날던 새는/길을 또한 지운다/새들이 하늘 높이 길을 내지 않는 것은/그 위에 별들이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시 <새는 자기 길을 안다> 전문)
하늘에 난 길은 눈에 보이지 않고 흔적도 없지요. 그 길은 창공에 번뜩이는 찰나의 직선이자 영원의 곡선입니다.
미지의 공간에 새들이 길을 내고 스스로 지우는 것은 “그 위에 별들이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요, 우주의 여백에 새 길을 다시 내기 위한 까닭이지요.
그 신생의 길에서 또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순간, 우리는 별을 물고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처럼 순백의 도화지에 새로운 선을 긋는 꿈의 날개가 되기도 합니다.√ 음미해보세요 팔순이 넘은 시인은 2019년 열두 번째 시집 <늦저녁의 버스킹>을 펴내며 “사람의 몸이 온갖 감정과 영혼을 담은 악기(樂器)”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습니다. 그의 시에는 오랜 경륜과 깊은 사색의 결실이 담겨 있지요. 다음 시 한 편도 빼놓을 수 없는 절창입니다. “하늘에 길이 있다는 것을/새들이 먼저 안다/하늘에 길을 내며 날던 새는/길을 또한 지운다/새들이 하늘 높이 길을 내지 않는 것은/그 위에 별들이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시 <새는 자기 길을 안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