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3025 캐럿의 비극
네덜란드어로 농부를 뜻하는 ‘부어(boer)’(독일어로 농부를 가리키는 ‘바우어(bauer)’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에서 나온 보어(boer)인은 남아프리카 지역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다.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 사람들은 1650년대 동인도회사 소속 식민지 주민으로 시작했다. 한때 케이프타운은 세인트헬레나에서 봄베이, 벵갈 지역까지 영향을 미치는 동인도회사의 영화를 상징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지역 네덜란드인들은 1795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몇 년 만에 영국에 점령당한 뒤 영국의 신민으로 살아갔다. 이후 영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일부 네덜란드계 주민은 영국과의 마찰을 피해 남아프리카 내륙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트란스발 지역에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이라는 네덜란드계 국가를 건설했다.
조용한 ‘농업 독립국’으로 남을 법했던 이들 지역의 운명을 바꾼 것은 다이아몬드였다. 1866년 오렌지강 연안에서 21캐럿짜리 초대형 다이아몬드 원석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농사짓고 있는 발밑에 초대형 다이아몬드 광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또 프리토리아 지역에선 무려 ‘3025캐럿’이라는 역사상 최대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됐다. 185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에 이어 남아공에도 거대한 금광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아공 지역은 맹목적인 충동과 탐욕이 집결하는 땅이 됐다.
이 같은 ‘노다지 판’을 영국이 가만 놔둘 턱이 없었다. 수에즈 운하 개통 이후에도 세계 식민지를 오가는 교통의 요지로서 남아프리카의 위상이 높았던 데다 당장 얻을 ‘돈’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1868년 영국은 2개의 독립국에서 발견된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했고, 1877년에는 남아공 내의 뤼덴부르크 금광 지역을 합병했다. 역대 최대 크기 다이아몬드는 영국 여왕의 왕관을 장식하는 보석이 돼버렸다. 또 영국의 식민지 개척가 세실 로즈는 남아공의 대규모 광구를 사들이면서 ‘드비어스’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했다. 세실 로즈의 후계자들은 드비어스를 통해 1896~1901년 매해 160만파운드가량의 배당을 챙겼고, 배당 수익은 1902~1904년 연평균 200만파운드에 달했다. 별 볼 일 없었던 남아공은 순식간에 재정적인 측면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보석으로 변했다.
영국은 네덜란드계 독립국인 남아공을 전복시키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고, 이는 보어전쟁을 촉발했다. 영국은 나폴레옹을 격파한 워털루 전투에 투입했던 병력의 두 배나 되는 8만 명의 병력을 아프리카에 보냈다. 세기말적 제국주의가 추악한 형태의 금과 다이아몬드에 대한 탐욕과 결합돼 나온 것이 보어전쟁의 시발이었다. 하지만 보어인들은 영국에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보어인은 독일제 무기로 무장돼 있었고, 보어인과 맞섰던 영국군은 과거 총도 없고 훈련도 안 된 원주민만 상대하다가 전략적 미스까지 겹치면서 체면을 구겼다. 특히 보어인의 게릴라전에 고전을 거듭한 영국은 ‘코만도’라고 불린 보어인 게릴라에 대한 일반 민중의 지원을 근절하기 위해 농장과 초원을 불사르고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을 일정한 공간에 가두는 수용소를 만들었다.
두 차례에 걸친 보어전쟁의 결과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와 같은 명칭인 ‘콘센트레이션 캠프(concentration camp)’라고 불린 수용소에서 2만6000명의 보어인이 ‘살육’당한 보어인 대학살이었다.
사상 최대 크기 다이아몬드와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의 발견은 대규모 인종 갈등과 전쟁이라는 피로 얼룩졌다. 영국으로서도 보어전쟁은 4만5000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와 2억5000만파운드에 달하는 전비, 도덕성과 제국의 위상에 미친 흠집 등으로 인해 ‘19세기 영국판 베트남전’이란 평까지 들었다. 결과적으론 손해 보는 장사였던 것이다. 아마도 다이아몬드는 그 화려함 못지않게 수많은 욕망이 뒤엉킨 비극을 태생적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NIE 포인트 1. 보어전쟁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2. 자원의 저주에 대해 알아보고 이를 피할 방법을 생각해보자.
3. 세계사 속 자원전쟁에 대해 학습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