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중국 농촌의 반(半) 프롤레타리아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농민 수만 늘린 18세기 중국 토지 상속제도…산업화 늦추고…농촌에 '가난 족쇄' 채워
전통시대 중국 농촌사회에선 여아 살해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갓 태어난 여아들을 말 그대로 접시 물에 코를 박도록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인구에서 상대적으로 여성이 적었다.

사회에서 여성이 줄어든 피해는 고스란히 빈곤층 농촌 노동자에게 집중됐다. 부유한 지주와 상류층은 첩까지 두고 살았지만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밖에 없었던 가난한 농촌 총각들에겐 장가 갈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됐던 것이다. 한마디로 혼인 적령기의 여성들은 이들 반(半) 프롤레타리아에게까지 차례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 결과 농촌 총각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2세를 재생산하는 것조차 실패했다. 하지만 중국 농촌사회에서 밑바닥을 차지하는 농촌 프롤레타리아 계층은 줄어들기는커녕 아무런 문제 없이 지속적으로 공급됐다. 이는 그들보다 나은 조건에 있던 사람들이 계속 하향 이동하면서 그들의 빈자리를 채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이 반복된 원인으로 필립 황을 비롯한 일군의 역사학자들은 인류학 연구에서 차용한 ‘인볼루션(invoiution)’이란 개념을 내세운다. ‘내권화(內捲化)’라는 용어로 번역되는 인볼루션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퇴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18세기까지 전통시대 중국은 농촌 가내수공업이 상당한 발전을 거두면서 유럽 못지않은 경제적 융성을 누렸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인 공장제 산업화로는 도약하지 못했다. 원시산업화 수준에서 멈춰선 채 그 자리를 맴맴 돌았던 것이다.

넘쳐나는 인구를 바탕으로 한 싼 노동력을 통해 인구당 생산성을 높이는 길이 아니라 토지 단위면적당 생산성을 향상하는 길을 모색했다. 강력한 인구압(人口壓)은 사회의 본질적인 개혁과 발전을 가로막았다.

인볼루션 상태를 벗어나는 조건 가운데 하나는 값싼 대규모 노동력이 농촌을 떠나 도시의 임시노동자로 자리바꿈하는 것이 꼽힌다. 공업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할 수많은 인구가 토지로부터 분리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하는 것이다. 농촌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주변화된 프롤레타리아트가 도시로 흘러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중국 농촌에선 유럽과 달리 이런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다. 600여 년간의 기간에 걸친 양쯔강 유역 농민의 생활수준을 연구한 필립 황에 따르면 가내수공업 생산양식에 기반을 둔 농민의 삶은 간신히 생존선을 넘는 수준에서 유지됐다. 중국에선 농촌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반 프롤레타리아트만 양산했다. 절반은 가내수공업 노동자지만 다른 절반은 여전히 일정 부분 농업에 발이 묶여 있는 인구만 대량생산됐다. 한마디로 ‘발전 없는 성장’이 재현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로 토지 제도가 꼽힌다. 중국에선 유럽과 달리 농민이 자식들에게 대체로 균등하게 토지를 상속했다. 토지 소유자들의 평균 보유 토지 규모는 계속 줄었고, 더 많은 수의 농민이 땅을 삶의 기반으로 삼고, 땅에 목을 매고 살아가게 됐다. 토지 제도 자체가 농촌 인구 대다수를 보다 효과적으로 땅에 결박해둔 것이다.

또 유럽보다 토지 매매가 활성화돼 농민들은 땅을 늘릴 수 있었고 자영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역으로 소작농이 자영농이 될 수도 있었다. 그 결과, 중국이 방대한 규모의 반 프롤레타리아들은 도시로 전격 이동할 수 있는 대규모의 뚜렷한 계층을 형성하지 못한 채 초기 가내수공업 상태의 공업화에 멈춘 농촌사회에서 계속 머물렀다. 환경은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은 물론 사회 전체 경제 성장의 발목도 붙잡고 있었다. NIE 포인트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1. 남존여비 사상이 발생한 이유를 알아보고 문제점을 나열해 보자.

2. 18세기 중국이 산업화를 못 이루고 가내수공업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원인을 알아보자.

3. 인류학에서 말하는 ‘인볼루션’의 개념을 자세히 학습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