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여성의 신분을 나타내는 신발
여성들의 지위가 하이힐 높이로 구분되던 시대가 있었다. 신발의 높이만 봐도 신을 신은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었고, ‘천한 것’들은 감히 높고 세련된 신발을 신을 수 없었다.하이힐은 16세기까진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17세기 초가 돼서야 서서히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하이힐의 등장은 우연이 아닌 단계적 발전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우선 스페인의 무어인 여성들이 신었던, 목재의 높은 굽이 붙은 신이 하이힐의 선구로 여겨진다. 이어 물림쇠로 채우게 된 신의 굽이 이탈리아에서 유행했고, 나무신이란 뜻의 ‘조콜리’로 불렸다고 한다. 당시 이 신은 인기가 좋았는데, 특히 높은 굽의 신발이 인기를 끈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이것이 진흙과 쓰레기, 대변 등으로 지저분한 거리를 건너는 데도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신은 이 같은 실용적 목적 외의 다른 목적에서 더 주목을 받고, 그것이 사용 이유가 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이힐을 신으면 키가 커 보여서 위엄 있는 인상을 풍긴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거리에 진흙탕이 없을 때도 여자들은 하이힐을 계속 신었고, 하이힐이라는 게 치마 밑에 교묘히 감출 수 있는 것인 만큼 키높이 구두처럼 애용됐다. 키 크게 보여서 위엄있는 인상 풍겨힐의 모양도 투박한 것에서 세련된 것으로 점차 변해갔고 여자들 간의 ‘구분 짓기’에 따라 힐의 모양도 세분됐다. 소시민이 신는 투박한 굽과 귀부인이 신는 신의 굽이 달랐고, 매춘부들이 신는 굽은 모양이 또 구분됐다. 특히 매춘부들은 결코 성큼성큼 걷는 법 없이 언제나 높은 하이힐을 신고 아장아장 걸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선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수도 빈에서 매춘부가 1만 명에 달했고, 파리에선 2만~4만 명, 1780년대 런던에선 5만 명 정도나 되는 엄청난 숫자였다.
프랑스 루이 15세 시기가 되면 굽의 높이는 16㎝에 이르렀다. 굽의 높이는 프랑스혁명 때까지 계속 높아졌다. 당시 활동했던 카사노바는 《회상록》에서 “프랑스 궁정에 들어가 보니 귀부인들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갈 때 엉거주춤한 자세로 뛰었다”고 전하고 있다.
하이힐 굽에 대한 개량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하이힐은 그 시대 여자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최고의 수단이자 가장 두드러진 상징으로 변모했다. 그에 따라 루이 15세 시기 굽의 높이는 여자의 위치와 위상의 증거였고 그 척도가 됐다. 루이 14세 시대 이래 프랑스는 사치 풍조가 급속히 확산되는 사회였다. 이런 시기에 하이힐도 큰 위력을 보이며 퍼졌다. 당대 지식인들이 “사람의 품위가 식탁과 그 밖의 사치품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가에 의해 평가되는 시대”라고 개탄하던 시기에 걸맞게 각종 사치 풍조가 경쟁적으로 퍼졌고, 패션은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다. 상류층 여성들 매춘부 패션 따라하기도하지만 이런 현상은 유럽 주요 국가에서 고급 창녀들이 사회적으로 ‘돌출’되면서 조금씩 예상 밖의 진로로 나가게 된다. 바로 신분이 높은 품위 있는 여성들의 취향이 창녀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는 엄격하게 구분되던 힐의 모양도 한편에서 매춘부 것이라고 딱히 구분되기 힘든 형태로 변해가면서도 전체적으로 한 방향으로 나가게 됐다.
유명한 창녀들은 어느새 패션의 모범이 되어갔고, 궁정에 대항하는 경쟁 상대로 등장했다. 상류사회 여성들도 남성 중심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지 않으려면 애첩, 창녀들과 일종의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 창녀들로부터 자극을 받아 그들의 장점을 수용했다. 저명한 경제사가 베르너 좀바르트에 따르면 여성들이 고급 창녀로부터 자극을 받아 수용한 가장 대표적인 장점이 ‘비로소 몸을 씻게 됐다’는 게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말이다.
불황기가 되면 ‘튀는 속옷이 잘 팔린다’든지 ‘올해도 짧은 미니스커트가 인기’ ‘올여름 아찔한 신발이 뜬다’ 등의 기사를 쉽게 볼 수 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오늘날의 풍속사를 어떻게 그릴지 궁금해진다. NIE포인트 1. 신발이 사회적 신분을 구분하게 만든 이유는 뭘까.
2. 경제와 패션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3. 오늘날 신발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