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

“모든 악의 근원은 탐욕과 야심에서 비롯된 권력욕이었으며,
일단 투쟁이 시작되면 이것이 광신 행위를 부추겼다.”
투키디데스
B.C. 460(?)~400(?)아테네 장군이자 역사가로 직접 참전했던 경험 등을 토대로 전쟁 상황을 실증적으로 기술했다.
투키디데스 B.C. 460(?)~400(?)아테네 장군이자 역사가로 직접 참전했던 경험 등을 토대로 전쟁 상황을 실증적으로 기술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은 그리스의 몰락을 가져온 대사건이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도시국가 아테네는 최대 번영기를 맞았다. 페르시아 전쟁(BC 499~449)에서 초강대국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며 스파르타와 함께 지중해 세계를 양분했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상무역 주도권을 잡았다. 민주주의 발전과 함께 문화예술 분야에서 전성기를 이루며 세력을 확대했다. 아테네의 팽창에 대한 스파르타의 견제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페르시아에 맞서 함께 싸운 동맹국끼리 벌인 27년간의 내전으로 그리스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아테네 팽창과 스파르타의 공포 충돌”
[다시 읽는 명저] 중우정치의 늪…쇠퇴의 길 걷게 된 아테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이 전쟁을 기록한 최고(最古)의 역사서다. 아테네 장군이자 역사가였던 투키디데스는 직접 참전했던 경험 등을 토대로 전쟁 상황을 실증적으로 기술했다. 아테네인이면서도 자국의 참담한 패배와 잔혹한 장면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등 균형된 시각을 유지하려 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국제적 역학관계 때문에 발생했다고 봤다. “아테네의 세력 신장이 스파르타인들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전쟁의 이유”라고 진단했다. 신흥 강국의 부상을 막기 위해 기존 패권국가가 전쟁을 벌이는 현상을 일컫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말이 나온 배경이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

투키디데스는 케르키라 내전을 서술하면서 전쟁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번영을 누리는 평화 시에는 도시든 개인이든 원하지 않는데 어려움을 당하도록 강요받는 일이 없으므로,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한다. 그러나 일상의 필요가 충족될 수 없는 전쟁은 난폭한 교사(敎師)이며, 사람의 마음을 대체로 그들이 처한 환경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그는 “이 모든 악의 근원은 탐욕과 야심에서 비롯된 권력욕이었으며, 일단 투쟁이 시작되면 이것이 광신 행위를 부추겼다”고 썼다.

냉혹한 국제관계의 현실은 기원전 414년 아테네가 멜로스의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벌인 ‘멜로스 회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테네 사절단은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고 했다. 약자가 강자의 뜻에 따르는 것이 정의이며, 힘이 있어야 정의를 말할 수 있다는 얘기다. 멜로스인들은 결국 항복했지만 아테네인들은 잔혹했다. 성인 남자를 다 죽이고,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로 팔았으며, 500명의 이주민을 보내 식민지로 만들었다.

아테네 몰락의 원인은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직접적인 원인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델로스 동맹국에 대한 착취와 지도자 페리클레스를 비롯해 시민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도 요인으로 꼽힌다. 플라톤이 지적한 ‘중우정치(衆愚政治)’도 아테네 추락의 큰 요인이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가 명색만 민주주의지였지 실제 권력은 제1인자 손에 있었다”며 “페리클레스의 후계자들은 서로 1인자 자리를 차지하려고 국가 정책조차 민중의 기분에 맡겼다”고 했다.

대표적인 예가 시칠리아 원정(BC 415~413)이다. 강경파 알키비아데스는 민회에서 “적은 노력으로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다”고 선동했다. 니키아스 등 신중파의 주장은 ‘용기 없는 핑계’로 들렸다. 투키디데스는 “다수가 원정에 열을 올리자 원정에 반대하는 소수는 반대표를 던지다가는 비(非)애국적인 인사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입을 굳게 닫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시칠리아 원정의 결과는 패배였다. 투키디데스는 “본국에 있는 자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음모를 꾸미느라 원정대가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고, 도시가 파쟁에 말려들게 했다”고 지적했다. 포퓰리즘 통제 못하면 중우정치 위험아르기누세 전투는 아테네의 국운을 완전히 떨어뜨린 최후의 비극이다. 기원전 406년 스파르타가 120척의 배를 몰고 와 에게해의 레스보스섬에 포진했다. 아테네는 155척을 보내 25척이 파손된 데 비해 스파르타는 70척이 수장됐다. 대승이었다. 그러나 침몰한 25척의 병사들을 구하지 않았다며 처벌을 요구하는 정치가들의 선동에 시민이 동조하면서 장군 8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1년 뒤 해군 지휘관을 모두 잃은 아테네는 스파르타 전함 170척에 180척으로 맞섰으나 160척이 수장되며 대패했다. ‘아테네 시대’는 막을 내리고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맹주로 올라섰다. 그러나 테바이, 마케도니아에 잇따라 무릎을 꿇으면서 스파르타의 영광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투키디데스는 “과거사에 관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강대국의 패권경쟁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포퓰리즘을 통제하지 못하면 중우정치에 빠져 국가의 운명까지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그리스의 몰락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역사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다.

양준영 한국경제신문 뉴스레터부장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