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 (83) 레이먼드 챈들러… '안녕 내사랑'
51세에 첫 장편소설 발표


[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 (83) 레이먼드 챈들러… '안녕 내사랑'
하드보일드(hard-boiled) 탐정소설의 종결자. 레이먼드 챈들러를 수식하는 말이다. 하드보일드는 1930년을 전후하여 미국 문학에 등장한 새로운 사실주의 수법을 이르는 말이다. 불필요한 수식을 모두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글쓰기를 뜻한다. 하드보일드는 기자 수련 시절 습득한 ‘첫 문장은 최대한 짧게, 쓸데없는 수식어는 전부 삭제, 힘있는 영어로 쓰라’는 교훈을 소설 쓸 때도 활용한 헤밍웨이에서부터 시작됐다.

‘레이먼드 챈들러, 대실 해미트, 로스 맥도널드’는 하드보일드 소설을 창조하여 완결한 3인방이다. 챈들러는 1888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0년대에는 런던의 몇몇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시와 수필을 썼다. 미국으로 건너와 많은 직업을 거친 끝에 석유회사의 부사장까지 올랐던 그는 48세 때부터 <펄프 매거진>에 범죄 단편들을 기고하면서 소설가가 되었다. 첫 장편소설 『빅 슬립』을 낼 때 그의 나이는 51세였고 1년 후 『안녕 내 사랑』을 발표했다. 그는 미완성작을 제외하고 모두 6편의 장편소설을 세상에 남겼다.
[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 (83) 레이먼드 챈들러… '안녕 내사랑'

그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필립 말로는 소설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며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안녕 내 사랑』은 우리나라 독자들이 그의 소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 속의 말로는 다소 느긋한 성격의 정의감 넘치는 인물이다.

사립 탐정인 필립 말로는 술집 앞에서 195㎝의 큰 키에 덩치까지 엄청난 무스 맬로이와 우연히 만난다. 감옥에서 나온 맬로이는 8년이나 못 본 ‘레이스 속옷처럼 귀여운 빨강 머리 벨마’를 찾아 헤매고 있다. 함께 들어간 술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서 맬로이는 사라지고 말로는 이상한 일을 의뢰받는다. 돈을 전달하는 자리에 함께 가달라는 매리엇으로부터 100달러를 받고 알 수 없는 곳으로 간 말로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가까스로 탈출한다. 말로는 자신이 당한 일에서 범죄의 냄새를 맡고 사건을 되짚으며 자신을 가해한 인물들을 하나하나 찾아간다.

[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 (83) 레이먼드 챈들러… '안녕 내사랑'
맬로이 사건과 매리엇 사건에서 경찰은 많은 것을 숨기며 의문스러운 행보를 한다. 말로는 경찰과 협조하면서도 자신이 취득한 정보 가운데 일부를 알리지 않는다. 수많은 복선과 사건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꼼꼼히 살피며 읽어야 작품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목숨이 위태로울 때도 박차고 나서는 용기 뒤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는데, 갈피갈피에 숨어 있는 이런 포인트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아름다운 부잣집 여인 그레일 부인과 착한 아가씨 앤 리오단이 말로와 미묘한 감정을 교환하는 장면도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마지막에 맬로이와 그레일 부인이 시간 간격을 두고 말로를 찾아올 때 극도로 긴장감을 느낀다면 매우 우수한 독자라고 할 수 있다.

추리와 사랑으로 얽힌 두 이야기

이근미 소설가
이근미 소설가
맬로이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늙은 부자 그레일과 결혼한 그녀, 머리색깔과 모습이 바뀌었지만 목소리는 그대로인 그녀에게 맬로이가 “안녕, 오랜만이야”라고 인사할 때 벨마는 그에게 총을 쏜다. 그 길로 도망갔던 그녀는 경찰에 발각되자 남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총을 겨눈다. 사랑의 사슬은 그렇게 엇나가고 말았다. 『안녕 내 사랑』은 제목에서 예고하듯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과 사랑이야기라는 두 장르를 동시에 담고 있다.

이 작품은 단서를 근거로 사건을 해결하는 숨가쁜 단순 추리소설이 아니라 멈춰 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조직적인 생활이 맞지 않아 경찰을 그만둔 말로가 경찰의 허를 찌르는 장면들과 공권력의 묵인하에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세밀한 묘사로 잘 그리고 있다.

말로가 홀로 불의와 맞서면서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 위험하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나를 죽일 이유가 없거나’ ‘나를 죽이면 상대가 위험해지는’ 단서를 찾아 헤쳐나가는 두뇌싸움이 끝까지 이어진다.

다양한 인간 군상의 치밀하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느긋하다가 말할 수 없이 용감해지는 필립 말로 때문에 느끼는 초조함이 오히려 긴장을 유발하는,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이근미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