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후된 유통구조

이명희, 구학서, 이승한은 한국형 유통혁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이명희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의 막내딸이다. 8남매 중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들 했다. 신세계백화점을 상속받은 그는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으로 새롭게 성공시키고 싶었다. 3500억원이라는 상속세를 곧이곧대로 납부한 것이 그 첫걸음이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찾다가 미국의 프라이스클럽 등을 모델 삼아 대형할인점을 시작했다. 1993년 11월 테스트 상점으로 서울 도봉구 창동에 이마트 1호점을 냈다.



월마트·까르푸에 도전하다

그다음은 믿을 만한 사람을 고르는 일이었다. “믿지 못하면 쓰지 말고,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라.”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사람을 쓰는 철학이었다. 1996년 이명희는 젊었을 때부터 눈여겨봐온 구학서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맡겼다. 정기적인 보고조차 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 무렵 월마트, 까르푸 등 외국계 대형마트들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후발주자로 살아남으려면 독특한 매력이 필요했다. 한국 소비자들이 창고형 매장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개별포장 제품을 늘리고 판매대의 높이를 낮췄다. 천장을 깔끔하게 단장해 백화점 느낌을 가미했다. 한국형 할인점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자국에서의 판매방식을 고집하던 월마트, 까르푸, 마크로 등은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중 월마트는 2007년 12개 점포 모두를 이마트에 넘겼다.

외환위기는 이마트에는 도약의 기회였다. 다들 어떻게든 땅을 팔려던 때였다. 하지만 구학서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전국을 다니면서 목 좋은 자리들을 사들였고 거기에 이마트 점포들을 세워 갔다. 전국 도시마다 요지에 점포들을 설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변두리의 땅값이 싼 지역을 골라 점포를 내는 서양식 마트와는 정반대 전략이었다. 그의 비전은 들어맞았다.

신세계의 또 다른 성공 전략은 윤리경영이었다. ‘신세계 페이’라는 이름을 걸고 기업 문화를 바꿔나갔다. 신세계그룹의 직원은 어떤 협력업체의 사람과 만나더라도 자기가 먹은 것은 자기가 내게 했다. 20년 전에 벌써 ‘김영란법’을 실천했던 셈이다. 깨끗한 기업 문화 덕분에 신세계와 이마트의 납품원가는 더욱 낮아졌고 소비자에게 더 좋은 상품을 더 낮은 가격에 제공할 수 있었다. 월마트가 자신의 점포들을 이마트에 넘긴 것도 윤리경영 덕분이었다고 한다. 구학서는 이제 고문으로 물러앉았다.



외국계 강자를 몰아내다

유통업계의 또 다른 강자인 홈플러스, 이곳을 맡아 성공시킨 기업가는 이승한이다. 삼성물산 대표이사였던 이승한은 1997년 새로운 할인점 홈플러스의 최고경영자(CEO)가 된다. 당초 삼성그룹이 세웠지만 영국의 테스코로 소유권이 바뀌었다. 이승한은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할인점보다 낮은 가격, 백화점보다 높은 품질’을 내걸었다. 홈플러스 점포를 지역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만들었고 그런 목적에 맞도록 별도의 건물을 지어나갔다. 쇼핑에 문화를 결합한 것이다. 직원은 지역주민 중에서 뽑았다. 주민들의 호응 덕분에 홈플러스 점포는 급속히 늘어갔다. 2008년에는 홈에버를 인수하면서 이마트와 1, 2위를 다투는 맞수로 올라섰다. 2013년 대표이사직을 사임했다.

2015년 홈플러스는 영국 본사의 여러 가지 사정 등으로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에 매각됐다.

우리가 무심코 누리는 안락함 뒤에 기업가들의 숨은 노력이 숨어 있음을 유통산업의 역사를 통해서 확인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