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유럽연합
축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유럽연합(EU) 창설 60주년을 맞은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에 모인 EU 27개국 정상과 고위집행부의 표정은 엄숙하고 진지했다. EU 정상들은 이날 서명하고 발표한 ‘로마 선언’에서 “EU가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10년 전 50돌을 맞았을 때만 해도 넘쳐나던 낙관론이 사라지고 위기감이 전면에 자리한 것이다.

“전쟁 막자”며 유럽 통합 추진

[뉴스 인 월드] 유럽통합 주춧돌 EU, 60년만에 균열 위기
로마 조약은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6개국 대표단이 1957년 3월25일 로마에 모여 체결했다. 이듬해 1월1일 조약이 발효됐고 그 결과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출범했다. 회원국 간 관세와 수량 제한(수입 쿼터)을 상당 수준 철폐하고 대외적으로는 공동 관세를 운영하는 관세 동맹이었다. 6개국 시장을 하나로 통합하려 한 시도였다.

2차 세계대전 승전국과 패전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프랑스 등 승전국은 국가 간 경제적 결속을 강화하고 상대 국가의 동향을 긴밀히 관찰해 전쟁 재발을 막으려 했다. 패전국인 독일(서독)과 이탈리아는 전범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수단으로 유럽 통합을 활용했다.

EEC는 1967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유럽원자력공동체(유라톰)와 집행부를 통합해 유럽공동체(EC)가 됐다. 회원국은 계속 늘었다. 1973년 영국과 덴마크, 아일랜드, 1981년에는 그리스, 1986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EC에 가입했다. 이들 12개국은 1992년 2월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 모여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체결하고 EC를 EU로 확대하기로 결의했다. EC가 주로 경제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라면 EU는 경제, 정치,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유럽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됐다.

회원국 28개국, GDP 합계 세계 2위

EU는 1993년 출범 이후 계속 세를 불려 지금은 회원국이 28개국에 달한다. 국내총생산(GDP) 합계는 작년 국제통화기금(IMF) 집계 기준 16조5187억달러(약 1경8542조원)로 미국(18조5619억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인구는 5억명이 넘는다. 1999년에는 단일 통화인 유로화를 도입해 미국 달러와 맞먹는 위상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유럽인이 EU에 대한 자부심보다 통합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EU 회의론’이 유럽 전역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여론조사업체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작년 봄 조사에서 유럽 사람들의 47%는 EU에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긍정적이라는 응답(51%)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 같은 여론은 유럽 정치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 6월 영국이 국민투표를 벌여 EU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한 데 이어 지난 16일 네덜란드 총선에선 반(反)EU·반난민을 내세운 극우 성향 자유당(PVV)이 20석으로 원내 제2당을 차지했다.

“무리한 통합이 되레 균열 야기” 지적도

경기 침체와 테러, 대규모 난민 유입, 국가 주권 훼손 등이 EU 회의론의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지나친 유럽 통합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크리스틴 아칙 미국 의회조사국(CRS) 유럽담당 연구원은 “경제력과 문화, 정치 수준이 각기 다른 나라를 무리하게 하나로 묶으면서 균열이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4년 사회주의 진영에서 벗어난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리투아니아 등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면서 동유럽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서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일자리 경쟁을 벌이게 된 기존 EU 회원국 국민은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유로화를 도입할 때도 선진 유럽과 경제력 차이가 많이 나는 그리스 등을 무리하게 가입시킨 것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위기’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EU 내부에서도 각 회원국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맞게 협력의 강약을 달리하는 ‘다중속도 유럽’이 힘을 얻고 있다. EU를 선진국과 주변국 등 다중 체계로 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이날 로마 선언에서 정상들은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함께 행동하되 필요하면 다른 속도와 강도를 취할 수 있다”는 문구를 담아 이를 시사했다.

임근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