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와일디치가 어릴 적 쓰다만 글을 완성한다는 이야기
불성실하라는 반어적 메시지 속 철학적 고뇌를 읽자
치료의 방편으로 시작한 글쓰기불성실하라는 반어적 메시지 속 철학적 고뇌를 읽자
영국 작가 그레이엄 그린은 21세에 첫 시집을 낸 이후 67년 동안 25권의 장편소설을 포함해 60권이 넘는 책을 냈다. 1991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바로 1년 전에도 단편집과 여행기를 출간할 만큼 열정적으로 집필했다. 그가 글을 쓰게 된 계기가 특별하다. 학생 시절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심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던 그에게 정신과 의사가 치료의 한 방편으로 글쓰기를 권유한 것이다. 그린은 글쓰기를 통해 절망감과 비참한 감정에서 벗어났고, 엄청난 양의 작품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시작과 끝을 대강 구상하면 놀라운 스토리가 끊임없이 날아드는 장편에 매력을 느낀 그린. 자신의 본류를 장편소설로 여기면서 열린 결말로 독자를 매혹시키는 단편소설 집필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세계 문학계로부터 장편뿐만 아니라 단편에서도 ‘의심할 여지 없이 최고 수준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레이엄 그린은 49편의 단편을 4권의 단편집에 나누어 발표했다. 기존 단편집에 들어가지 않은 4편을 추가해 53편이 실린 그린의 단편집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961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두꺼운 책에 다채로운 작품을 담았다.
삶이 불안정했던 그린의 작품에는 불안함과 공포라는 창을 통과하는 그만의 독특한 시각이 담겨 있다. 그린은 “자신의 단편소설 가운데 어떤 요소가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에 ‘가독성’을 가장 먼저 꼽았다. 상징이나 모호성, 지루한 묘사를 걷어내고 분명한 상황과 스토리를 통해 세계관을 전한 덕분에 재미있고 잘 읽힌다. 이야기를 하나하나 열 때마다 독특한 매력에 빨려들게 될 것이다.
작가 자신이 가장 잘 쓴 단편으로 <정원 아래서><파괴자들><레버 씨의 기회><8월에는 저렴하다>를 꼽았다. <정원 아래서>는 회복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진단을 받은 와일디치가 50년 만에 고향집에 가서 어릴 때 쓴 글을 발견하고 그 이야기를 완성하는 내용이다. 일곱 살로 되돌아간 와일디치는 ‘변이의 세대’에서 태어났다는 재빗과 나눈 대화를 복원한다. 정원 동굴 아래 사는 다리가 하나뿐인 재빗의 얘기는 반어적이면서 철학적이다. “불성실해라. 성실한 사람은 불안, 총탄, 과로 따위로 먼저 죽으니까” “여자와 하느님은 둘 다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사람을 존중한단다” 같은 말들이다. 글쓰기를 마친 와일디치는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결심이 생겨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어린 와일디치와 재빗이 나누는 대화를 각자의 기준에서 해석해보면 의미있을 것이다.
불안과 꿈을 소설로 바꾸다
<파괴자들>은 10대들이 조직한 ‘윔즐리코먼 갱단’이 토머스 씨의 200년 된 집을 파괴하는 이야기다. 투덜이 영감이 집을 비운 사이 내부에 있는 모든 걸 뜯어내 폭삭 무너지게 하려는 아이들, 집이 무너지자 웃음을 참지 못하는 트럭 운전사,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생각하며 읽어보라.
가끔 흥미진진한 꿈을 꾸고 나서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으리라. <이상한 시골 꿈>과 <모든 악의 근원>은 그린이 실제로 꾼 꿈을 약간 변형한 내용이다. <이상한 시골 꿈>은 한센병에 걸린 은행원이 은퇴한 의사에게 비밀 치료를 부탁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감염성 환자이니 병원으로 가라는 답변에 은행원은 좌절하고 만다. 그날 의사의 집은 장군을 위한 파티 장소로 제공되고, 휘황하게 바뀐다. 그날 밤 많은 사람이 모여 룰렛 게임을 즐기고 술 취한 젊은 장교는 정원에서 실수로 총을 떨어뜨린다. 다시 한번 의사에게 치료를 부탁하러 간 은행원은 낯선 상황에 당황하고, 얼마 후 먼 곳에서 희미한 폭발음이 들린다. 뒤죽박죽 바뀌는 장소, 재미있게 연결되는 요상한 이야기, 꿈이 주는 선물을 그레이엄 그린처럼 소설로 만들어 보라.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올랐지만 끝내 수상하지 못한 그린은 “자네는 언제 그 상을 받으려나?”라는 친구의 질문에 “나는 그보다 더 큰 상, 죽음을 기다린다”고 답했다. 재미있고 의미 있으면서 아득함까지 선물하는 53편의 단편으로 일상을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