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교수의 대한민국 기업가 이야기
(1)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종로4가 로터리의 창경궁 쪽 모퉁이에 두산그룹 발상지라는 이름의 소공원이 있다. 1896년 박승직이라는 상인이 이 자리에서 박승직 상점을 열었다. 이 상점이 나중에 두산그룹이 된다. 이 소공원은 1996년, 두산그룹이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조성했다. 120년 역사의 두산그룹은 현존하는 한국 기업 중 최장수 기업으로 공인됐다.
(1)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박승직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이자 해방 직전 상점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6·25 전쟁이 나던 1950년, 86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끝난 것은 아니다. 1946년 그의 아들 박두병에게 가게 문을 다시 열게 하고 두산(斗山)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갑오개혁과 박승직 상점

서울에 포목점을 열려면 육의전 상인이어야 했다. 박승직 같은 보부상은 정식으로 가게를 내고 장사를 하면 안 됐다. 광목, 비단, 명주, 모시 같은 옷감뿐 아니라 종이, 어물 등이 모두 규제 대상이었다. 육의전이 아닌 상인들은 ‘난전’이라고 불렸으며 언제든 폭력적 단속을 당해야 하는 처지였다. 수백년간 그랬다. 그 때문에 조선의 상업은 피폐했고 백성들의 삶은 궁핍했지만 수백년 동안 육의점 독점 체제는 변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1894년 갑오개혁으로 변화가 왔다. 육의전 독점권이 폐지된 것이다. 떠돌이 상인들, 즉 난전들도 비로소 합법적으로 떳떳하게 자기 가게를 낼 수 있게 됐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6년 박승직도 자기 이름을 내걸고 박승직 상점을 열었다. 그 상점이 해방 후 두산그룹으로 발전했다.
옷감 화장품 쌀 거래…‘배오개의 거상’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보부상 박승직, 두산그룹의 터를 닦다](https://img.hankyung.com/photo/201701/AA.13123308.1.jpg)
상인으로서 박승직의 영향력이 컸음은 1919년 고종께서 승하했을 때, 그리고 1926년 순종께서 승하했을 때도 박승직이 상민봉도단장을 맡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봉도단이란 임금의 상여를 매기 위해 조직한 모임이다. 왕가봉도단, 상민(常民)봉도단 등으로 구성됐는데 박승직은 그런 국가적 행사에 두 번이나 상민 대표로 선발됐다. 대표적인 거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약속과 신용의 상인이 되다

박승직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이자 해방 직전 상점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6·25 전쟁이 나던 1950년, 86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끝난 것은 아니다. 1946년 그의 아들 박두병에게 가게 문을 다시 열게 하고 두산(斗山)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말(斗)들이 쌓여 산을 이루라는 뜻이 담겼는데 그의 뜻대로 됐다. 박승직 상점에서 OB맥주로 변신을 했고, 1990년 대 말에는 두산중공업이라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박승직의 정신은 두산그룹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