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화점에선 '메리 크리스마스' 말도 못쓰게 하고
무슬림 배달원이 술배달 거부해도 해고못해 논란 폭발
소수자보호운동에서 시작됐다무슬림 배달원이 술배달 거부해도 해고못해 논란 폭발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 모두가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고 말할 수 있게 하겠다.”
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해 10월 아이오와주 선거 유세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외친 말이다. 그는 “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자리에 있던 군중은 환호했다. 미국인들은 어떤 이유로 ‘메리 크리스마스’에 들끓은 것일까.
발언의 의미를 따지자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용어부터 설명해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성·인종·약자 등에 대한 차별적인 언어를 자제하자는 움직임을 말한다. ‘흑인’ 대신 ‘유색인종’ 혹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부른다거나, 남성 중심적 단어인 대변인(Spokesman)을 중립적인 의미의 ‘Spokesperson’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작업이다. 이전까지 일부에서만 사용하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부상한 건 1980년대 미국 페미니즘 운동에서 사용하면서다.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여성 차별적인 단어들을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이 움직임은 점차 여성만이 아니라 소수자 보호를 위한 인종, 종교 등을 포괄하는 운동으로 확대됐다.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미국 각지의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성차별, 인종차별의 의미를 담은 표현을 시정하는 데 큰 성과를 거뒀다.
정치적 논란이 점화한 건 199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의 미시간대 졸업 연설에서였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출발은 칭찬할 만한 것이지만 그 때문에 새로운 편견을 만들어내고 있다”며 “특정 주제나 표현, 행동에 대해 전혀 논의하지 못하게 만들어 논쟁과 검열을 양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에는 이 정치적 올바름이 지나친 자기검열을 유도하며, 가식적이라고 보는 주장도 군데군데서 제기되고 있었다.
미국 주류인 백인 사이에 불만
수십년간 정치적 올바름은 미국인이라면 지켜야 할 일종의 규칙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 백화점 등 대부분 쇼핑몰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연말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금지돼 있다. 대신 ‘즐거운 휴일(Happy Holidays)’ 등으로 대체됐다.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정치적 올바름을 고려한 조치다. 미국 학교에선 성조기를 내거는 것도 껄끄럽다. 다른 국적의 학생이 많기 때문이다. 음식배달원이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일 경우, 술 배달도 마음대로 못 시킨다. 술 배달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해고한 가게주인이 3억원을 보상한 일도 있었다. 부시 전 대통령의 지적이 엉뚱한 것만은 아니었다.
‘PC’에 대한 반감은 이민자들이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IS(이슬람국가)가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면서 강해졌다. 미국사회 주류로 불리는 백인, 특히 백인 남성들의 불만이 폭발 지경에 이르렀다. 트럼프는 이 부분을 건드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공약도 소수자에 대한 배려로 억압받아왔다고 느끼는 미국인에게 자유를 되찾아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그동안 금기로 여겨왔던 여성 비하나 이민자들을 내쫓겠다는 공약도 거침없이 쏟아냈다. TV 토론회에서 날선 질문을 던진 폭스뉴스 여성앵커 메긴 켈리를 ‘빔보(bimbo: 외모만 섹시한 머리가 빈 여자)’로 지칭했고,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고 하면서 “이민자 사이에 성폭행범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지난해 공화당 대선 경선 토론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깨는 것이 대선 캠페인의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말했다. 언론과 기성 정치인들이 그에게 맹비난을 쏟아냈지만 표심은 반대로 흘렀다. 지난 9일 트럼프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제치고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미국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부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주류사회를 흔들어 놓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8일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 당선을 이끈 건 ‘샤이 트럼프(Shy Trump)’, 즉 공개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하지는 못했지만 그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이다.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줄곧 클린턴이 앞섰지만 트럼프가 당선된 건 이들 덕분이었다. 그렇게 표를 던진 사람 중 상당수는 분노한 백인을 의미하는 ‘앵그리 화이트(Angry White)’였다. 대선 결과 백인 표 가운데 클린턴에게 간 건 37%인 데 비해 트럼프에게는 58%가 몰렸다. 성별로는 남성의 53%가 트럼프에게 표를 줬고, 백인 남성으로 한정하면 63%가 트럼프를 선택했다.
소수자증오 범죄…위협받는 ‘PC’
워싱턴포스트는 “고학력 부유층 백인 유권자들이 여론조사에서는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여성이나 이슬람교를 비하하는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밝히지 못했지만 투표장에서는 트럼프를 찍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당선으로 미국 사회는 변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소수자 증오 범죄가 늘어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숨겨왔던 분노를 공개적으로 표출할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우려는 현실화하고 있다. 10일 한 대학 캠퍼스에서 히잡을 쓴 한 여성이 남성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지갑과 히잡을 빼앗겼다. 미국 인권단체 남부빈민법센터(SPLC)는 9일부터 14일까지 파악한 증오에 따른 괴롭힘·협박 건수가 437건에 달했다고 밝혔다.
홍윤정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yj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