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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고등학교 1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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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성균관대 경영학과 3학년)
시장(市場)과 친해지자!…시장이 정의다
![황단비 9기 생글기자
(중앙대 철학과 1년)](https://img.hankyung.com/photo/201611/AA.12765564.1.jpg)
이렇게 다양한 브랜드와 제품이 생겨나는 이유는 ‘시장 경쟁’이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생산자들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경쟁한다. 경쟁에서 살아남느냐, 도태되느냐는 소비자에 의해 결정된다. 소비자의 선택을 받은 제품은 경쟁력을 확보하는 반면, 선택받지 못 한 제품은 시장에서 퇴출된다. 혹자는 시장 경쟁이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 시스템이라며 격차를 심화시킨다고 비판한다. 경쟁보다는 함께 잘사는 것이 더 중요하단다. 과연 경쟁을 억제하면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이는 자유냐 평등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두 가치 중 어떤 것이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지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차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두 나라는 국민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도입했다. 양자 모두 각자가 선택한 체제가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 믿었다. 두 나라는 각자가 선택한 체제에 입각해 국정을 운영했다. 수십 년 후, 상반된 결과가 나왔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선택한 대한민국은 전례 없는 성장과 동시에, 지속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다. 반면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선택한 북한은 빈곤에 시달렸다. 김씨 일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가난한 삶을 사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처럼 시장과 경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국가의 성패(成敗)가 좌우된다. 친(親)시장적 국가는 번영하지만, 소련이나 북한처럼 시장에 적대적인 국가는 자멸한다. 대한민국은 체제로 인해 부강해진 나라다. 총소리 하나 나지 않고 일제의 침략을 당할 정도로 힘없던 땅에서 세계 10위의 강국이 탄생했다.
시장경제가 번영을 가져다주는 체제임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대한 오해를 지니고 ‘경쟁 대신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시장이 제로섬(zero-sum) 게임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시작된다. 시장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협의적 관점에서 경쟁과 격차는 힘든 일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경쟁은 더 좋은 인재와 제품을 발견하는 계기요, 격차는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유인책이다.
지금도 부익부 빈익빈, 정글자본주의 등 시장경제를 왜곡하는 용어들이 국민들에게 반(反)시장 정서를 주입하고 있다. 여기에는 격차는 정의롭지 못 한 것, 평등은 정의로운 것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기회의 평등 이외의 ‘평등’은 정의(正義)가 아니다. 개인이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정의에 역행한다. 정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존중하는 시장경제, 생산자가 더 좋은 제품을 생산하도록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경쟁이다. 시장경제야말로 가장 정의로운 것이다.
황단비 9기 생글기자 (중앙대 철학과 1년)
개똥벌레가 주는 교훈…개체와 집단은 다르다
![이루다 10기 생글기자
(고려대 경영학과 1년)](https://img.hankyung.com/photo/201611/AA.12765561.1.jpg)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를 간과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21세기 사회에서 그것(개체와 집단의 동일시)은 간편하고 효율적이라 여겨지곤 한다. 흔히 우리는 초면인 사람을 만났을 때,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며 알아가기보다는 미리 그 개인이 속해 있는 단체의 성격을 파악하여 단순히 대입해 버리고 만다. 사실, 나도 그랬다. 지난 여름방학에 정부 주최로 열린 한-일 청소년 교류회에 참석하였는데 생각보다 언어의 장벽이 높아 일본인 친구들과 교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 방편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라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일본인의 특성을 그대로 대입해 다가갔다. 그들이 감정 표현을 할 때 한번 더 생각하거나 반대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5일 동안 함께 지내니 꼭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집단의 대표성을 ‘보여주는’ 개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개인도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개체를 바라볼 때 그 개체가 속해 있는 집단의 성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있을까? 대체로 불가능하다. 어떠한 개체를 처음 접한다면, 이미 알고 있는 그 개체의 집단적 성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선입견을 문제시할 수는 없다. 선입견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미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관념이나 관점을 말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존의 생각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관건은 기존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이 존재하는 가의 여부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한 개체를 집단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선입견 그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 선입견이 틀렸을 때 그것을 ‘깰’ 수 있는 힘인 것이다. 즉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사고를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이라 할 수 있다.
초등학교 무렵 ‘개똥벌레’ 동요를 배울 때 왜 다른 벌레들과 달리 개똥벌레에는 징그러운 느낌이 들지 않을까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벌레라는 집단의 이미지를 개똥벌레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벌레’라는 집단이 아닌 ‘개똥벌레’ 그 개체의 고유성에 주목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한 개체에 대해 집단이란 선입견을 대입했다고 당황하지 말자. 바꾸면 되는 것이니까.
이루다 10기 생글기자 (고려대 경영학과 1년) ruda9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