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KDI 연구원 kimmj@kdi.re.kr
따뜻한 봄 날씨가 절정인 4월부터 5월 초쯤이면 튤립이 참 예쁘게도 핀다. 이맘때면 알록달록 형형색색 튤립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튤립축제가 곳곳에서 열리곤 한다. 그런데 이처럼 봄 축제를 주도할 만큼 한없이 어여쁜 튤립이 한때는 엄청난 투기의 대상이 되어 한 국가의 시장경제를 대혼란에 빠지게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튤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네덜란드다. 네덜란드에 관한 사진을 볼 때면 넓은 들판에 온갖 종류의 튤립이 펼쳐져 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실 튤립의 원산지는 네덜란드가 아닌 터키다. 16세기 후반, 튤립이 터키에서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튤립의 이색적인 모양이 유럽 귀족과 상인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당시 1960년대 네덜란드는 유럽국가 중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던 나라 중 하나였는데, 국토가 좁다 보니 큰 정원은 만들지 못하고 아담한 정원을 고급스럽게 가꾸어 부와 교양을 과시하는 취미생활이 유행했다. 그런데 튤립이 네덜란드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터키 황제들이 튤립을 비싼 가격에 산다는 소문이 돌았고, 네덜란드 귀족과 부유 상인들에게 튤립은 자신의 기품과 부를 뽐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네덜란드에서 튤립의 인기가 상승할수록 튤립을 찾는 수요는 증가했다. 그리고 시중에 공급되는 튤립은 점차 그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튤립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희소성은 커져갔고, 튤립 가격은 상승했다. 문제는 튤립 가격 상승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너무 커졌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튤립 가격이 앞으로 더 많이 오르리라고 예상하며 튤립을 구매하여 되팔아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튤립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역사 속에 길이 남을 엄청난 투기 사건인 ‘네덜란드 튤립 투기’가 시작된 것이다.
흔히 투기라는 말은 투자라는 말과 혼돈돼 사용되곤 한다. 이 두 용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투자는 장차 얻을 수 있는 수익을 위해 현재 자금을 지출하는 것을 말한다. 경제 영역에서 투자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생산 활동과 관련된 자본재의 총량을 유지하거나 증가시키는 활동을 말한다. 자본재라는 말이 생소할 수 있으나 자본재는 우리가 최종적으로 사용하는 소비재의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생산수단, 중간생산물 등을 말한다. 공장, 기계, 건물, 원료, 제품의 재고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투자는 생산 활동을 영속하고 장기적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므로 경제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에 반해 투기는 투자라는 단어와 비슷하지만 그 뜻은 묘하게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내가 하면 투자, 남이 하면 투기”라는 우스갯소리를 생각해보면, 투기라는 말은 투자에 비해 어딘가 부정적인 느낌을 담고 있는 듯하다. 사실 투자와 투기를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은 쉽지 않다. 투자와 투기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의 동기 및 목적 등을 생각해봐야 한다. 투자와 투기 모두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은 같지만, 투자는 생산 활동을 통한 이익을 추구하는 반면, 투기는 생산 활동과는 관계없는 이익을 추구한다. 흔히 투기는 단기간에 대폭적인 가격변동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매매를 하는 행위를 말한다. 즉 어떤 대상의 가치변화에 주목하고 생산 활동 내에서의 수익창출을 예상하여 현재 자산을 사용한다면 투자라고 할 수 있고, 어떤 대상의 가격 등락 차이에 주목하고 여기서 발생하는 수익을 예상하여 현재 자산을 사용한다면 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자산으로 미래 수익을 예상하며 주식을 구매할 경우, 해당 기업의 내재된 가치를 판단하여 주식을 구매한다면 투자라고 볼 수 있지만, 주식의 단기적인 수요와 공급을 판단하여 매수 가격보다 주가가 올랐을 때 주식을 되팔아 수익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투기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6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이 튤립의 구매 차익을 얻기 위해 너도나도 튤립을 사들인 현상은 엄연한 투기현상이었다. 투기는 거래 대상의 본질적 가치에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인 가격의 단기적 변화만 보고 거래하기 때문에 상품에 대한 가치를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시장 내에서 형성된 심리적 영향으로 어떤 상품의 시장가격이 실질적인 가치보다 높게 평가되는 현상을 거품현상이라고 하는데, 사회적으로 투기가 심화되면 거품현상이 발생하곤 한다. 이로 인해 상품의 시장가치가 왜곡되고 시장경제는 균형을 잃게 되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큰 위험 요소가 된다.
실제로 네덜란드 튤립투기로 인한 거품 현상은 엄청났다. 당시 가장 희귀하고 비싼 튤립이었던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줄무늬 튤립은 알뿌리 하나가 황소 46마리 혹은 돼지 183마리의 가격으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이는 서민 1년 생활비, 암스테르담의 집 한채 값보다도 훨씬 비싼 가격이었다. 그런데 거품현상의 가장 무서운 점 중 하나는 부풀었던 거품이 한순간에 붕괴될 때에 있다. 이처럼 시장을 교란시킨 튤립시장의 거품은 단어의 본래 뜻처럼 한순간에 사라지는 시기를 맞이했다. 1963년 2월, 사람들이 튤립을 팔기 위해 시장에 내놓았으나 가격이 너무 오른 탓에 이를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미 높은 가격을 주고 튤립을 구매해 놨던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고 낮은 가격으로라도 튤립을 팔려고 시도했다. 이런 심리현상으로 인해 시장은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튤립 가격은 순식간에 무려 95%나 폭락했다.
거품이 붕괴되었을 때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계층은 자신의 구입가능 수준보다 무리해서 투기를 한 사람들이다. 단기적으로 떼돈을 벌기 위해 욕심을 부린 사람들은 빚을 져서라도 투기에 참여하곤 하는데, 이는 거품현상이 붕괴됐을 때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위험이 된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귀족, 부유층뿐만 아니라 일확천금을 노리는 일반 서민도 튤립투기에 참여했고, 그중 많은 이가 땅이나 집을 저당 잡아 빚을 져서 튤립을 구매했다. 그런데 튤립시장의 거품이 붕괴되자 사람들은 튤립을 구매한 비용을 회수하기는커녕 빚더미에 앉게 됐다. 이들은 하룻밤 사이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튤립 거래소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사람들이 빚을 졌던 부동산 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야기된 네덜란드 경제의 공황상태는 회복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어떤 상품이나 자산이든 인기가 많다고 해서,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해서 따라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엔 갖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도 참 많고, 손쉽게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욕심도 난다. 하지만 합리적인 소비자라면 현재 욕심을 충족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 자산보다 무리해서 돈을 지출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미래 소득 수준과 지출 정도를 고려해 허황된 표면적인 가치가 아닌, 대상의 본질적인 가치를 꿰뚫어보는 현명한 투자자가 돼야 할 것이다.
김민정 KDI 연구원 kimmj@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