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뉴스] "사두면 돈 된다" 경제위기 러시아, 수입 가전 '싹쓸이 쇼핑'
지난해 말 러시아에서 가장 큰 가전매장인 엠비데오의 모스크바 매장 전시대가 텅 비었다. 시민들이 해외에서 수입한 가전과 TV를 사재기했기 때문이다. 애플 아이패드와 대형 TV 등 고가 제품일수록 더 빨리 판매됐다.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가전제품 온라인 판매량도 전년 동기 대비 156% 늘었다. 하지만 지난해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은 3.7% 감소했다. 러시아 경제를 지탱하는 에너지 가격도 2013년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경제위기 와중에 가전제품 판매는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지난 3일 모스크바에서 만난 한국 기업 주재원은 “루블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실물을 사서 가치를 보존하려는 시도”라며 “사재기한 물품은 포장도 뜯지 않고 중고시장에서 거래된다”고 설명했다.

루블화 가치 2년새 ‘반토막’

지난해 러시아의 실질임금은 전년 대비 9.5% 하락했다. 정부 재정적자는 33억달러에 이르고 산업생산은 3.4% 뒷걸음질쳤다. 러시아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한 해에만 러시아 국민의 13%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반등의 조짐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알렉세이 쿠드린 전 러시아 재무장관은 “이렇다 할 호재가 없으면 올해도 경제성장률은 -2% 정도를 나타낼 것”이라고 말했다. 한 한국 무역회사의 러시아 법인장은 “시장 자체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며 “유가 반등이 좀처럼 어려운 데다 해고가 쉽지 않은 경제체제 자체의 모순도 있어 1998년이나 2008년 경제위기와 달리 회복이 어려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치 변수가 경제에 영향을 주는 사례도 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 12월부터 자국민의 터키 여행을 전면 금지했다. 시리아 반군 점령지역을 공습하던 자국 전투기가 터키군에 격추된 데 대한 보복조치다. 터키는 따뜻하고 물가가 싸 러시아인이 선호하는 여행지역으로 전체 관광객의 12%가 러시아인이다. 서방의 경제제재가 시작된 2014년엔 맥도날드가 유탄을 맞았다. 위생 문제를 이유로 매장 12개가 폐쇄됐다. 외신에서는 “경제제재를 주도한 미국에 대한 러시아 지도부의 불편한 감정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반사효과는 같은 미국계 패스트푸드 체인인 버거킹이 누리고 있다.

‘에너지산업 의존 줄이기’ 안간힘

이런 가운데 러시아 정부는 재정 수입의 50%, 수출의 70%를 차지하는 에너지산업 의존도를 줄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올해부터 기계·설비, 식료품과 농림업 장비, 경공업 등 18개 산업에 대한 현지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 도심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스콜코보혁신단지가 대표적인 예다. 1386만㎡ 넓이의 부지에 외국 기업과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을 위한 업무공간 및 연구소는 물론 전용 주거단지와 공학 대학까지 들어서고 있다. 니콜라이 크루치닌 스콜코보혁신단지 홍보담당관은 “매년 수백개의 러시아 내 스타트업이 경진대회를 열어 입상한 10개 이내 기업에만 입주 자격이 부여된다”며 “바이오와 소프트웨어는 물론 핵에너지와 농업 등 폭넓은 분야의 기업이 스콜코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조업 기지 매력도…“진출엔 신중”

환율 상승으로 러시아 인건비가 떨어지면서 제조업 기지로서 매력도 부각되고 있다. 러시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7월 러시아 근로자의 평균 월급은 597달러로 중국(775달러) 루마니아(632달러)보다 낮다. 자동차 전문지인 JD파워 역시 러시아에서 자동차 한 대 생산에 필요한 인건비가 230유로로 터키(300유로) 루마니아(400유로) 등과 비교해 싸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보쉬와 지멘스가 합작해 세운 BSH는 러시아 내 제품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렸다. 스위스 화장품업체 오리플람도 작년 2월 러시아 공장을 신설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러시아 진출 외국 기업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러시아 내수시장을 겨냥해 공장을 설립했는데 시장이 쪼그라들고 있어서다. 기업들은 적극적인 사업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는 지난해 3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폐쇄하기로 했다. 포드도 연간 16만대 규모인 러시아 내 생산량을 1만5000대까지 줄였다. KOTRA 모스크바 무역관 관계자는 “여러 악재가 있는 만큼 한국 기업은 진출 여부를 판단하는 데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노경목/박진우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