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오해와 진실 (35) 자본주의와 빈부격차 논쟁
“우리는 사람들을 눈먼 시장의 힘에 종속시키고, 그 같은 힘이 민족들의 발전을 좌우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 부활을 곳곳에서 목도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대다수 국가를 더 빈곤하게 만들면서 소수의 나라가 극도로 부유해지는 것을 본다. 그 결과 부자는 갈수록 더 부유해지고, 빈자는 더욱 더 가난해지고 있다.”이 말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8년 쿠바 아바나에서 한 설교 중의 한 대목이다. UN 밀레니엄캠페인도 ‘세계 최고의 부자 3명이 가장 가난한 나라들에 사는 6억명보다 더 많은 부를 좌지우지한다’고 보고했다. 한국에서도 빈부격차 문제, 양극화 문제를 제기하는 주장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국가 내에서의 계층 간 빈부격차 문제든 국가 간 빈부격차 문제든 모든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사실일까.
빈부격차 문제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떤 사회에서나 존재해 왔다. 고대사회에서 가장 발달했다는 로마에서는 전체 로마제국 5000만~6000만명의 인구 중 0.05%에 불과한 호네스티오레스(더 고귀한 자들)들이 부의 80%를 소유했고, 이른바 하루살이처럼 ‘벼랑 끝’ 삶을 살던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65%에 달했다고 한다. 1800년대 말까지만 해도 가뭄과 기근으로 수단 에티오피아 등 일부 국가에서는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소수의 지배계층만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람들이 기근으로 인해 굶어 죽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됐다. 국제적으로 보더라도 지금은 지구의 일부만이 가난하지만,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는 모든 지역이 다 가난했다. 자본주의로 인해 인류가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빈부격차의 폭도 훨씬 줄어들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빈부격차에 대한 비난은 항상 자본주의를 향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빈부격차에 대한 이런 비판이 꽤 보편적인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좀 잘산다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서나 이런 말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잘살게 된 국가에서나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마크 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는 것’이 발전된 사회의 책임감 있는 시민이 자신의 미덕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그는 무엇엔가 유감을 품음으로써 안심하는 것”이라고. 이런 점에서는 한국의 이른바 ‘강남 좌파’의 행태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도 우리가 잘사는 사회가 되면서 생겨난 일종의 부산물이다.
빈부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사회주의처럼 사유재산을 폐지하거나,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거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이다. 국가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유재산을 모두 몰수해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 다음 타인보다 더 잘살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사회주의식 처방은 역사가 증명했듯이 ‘지옥’으로 가는 길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약속은 불평등과 빈곤, 비참함과 정치적 압제로 이어졌다. 자본주의 대안으로 여겨졌던 사회주의에서 소득 불평등은 훨씬 더 심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특유의 유머러스한 표현을 써서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 고유의 악덕은 축복의 불공평한 배분이고, 사회주의의 본질적 미덕은 불행의 공평한 분배다.”
결국 빈부격차 해소의 처방전으로 남는 것은 세금을 걷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복지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문제는 복지정책은 한 번 시행되면 되돌리기 어려운 습성을 갖고 있으며, 그 깊이와 폭이 한없이 심화되고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복지정책이 현대의 대중민주주의와 결합하면 쉽사리 복지포퓰리즘으로 변질되면서 이른바 ‘복지병’으로 불리는 망국병으로까지 진척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무상급식은 처음에는 밥을 굶는 ‘결식아동들에게 한 끼를’이라는 취지로 1989년에 시작, 1997년까지 1만2000여명의 아이들에게 제공됐다. 그런데 출발 10년 뒤인 1999년에 무상급식은 ‘굶는 아동을 위한 급식’에서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로 전환됐다. 그 결과 1999년에는 수혜 학생이 2년 전에 비해 10배가 넘는 15만1000여명으로 급증했다. 그 이후에도 무상급식의 혜택을 받는 학생 수는 계속 늘어나 다시 10년 뒤인 2009년에는 무려 70만명을 넘었다. 마지막으로 2010년에는 ‘눈칫밥론’이 등장하면서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는 ‘전면적 무상급식’으로 넘어가게 됐다. 이에 따라 이제는 모든 학생에게 무상으로 급식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인과 유권자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퍼주기 경쟁’ ‘공짜 경쟁’ ‘묻지마 복지’로까지 나아간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이런 일이 벌어지면 소위 민주적인 절차라는 것이 정의나 원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종의 정치적 편의주의의 제물이 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과거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와 최근의 그리스 사태에서도 우리는 복지 포퓰리즘으로 인한 국가의 몰락을 분명하게 목격할 수 있다.
사람들의 외모, 성격, 능력, 체력, 선호하는 것 등 모두가 각기 다르듯이 이들이 만들어내는 결과에서 차이가 나는 것 또한 당연하다. 격차는 자연스럽고 또 당연하다는 말이다. 게다가 타인에 대한 열등감, 시기심, 부러움을 가진 것이 인간이다. 아무리 노력한들 인간이 갖고 있는 이런 본성까지 제거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격차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희망은 헛된 꿈에 불과하다. 앞서 보았듯이 격차를 제거하고자 하는 인위적인 노력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 후유증은 너무나 크게 남는다.
인간의 본성과 격차의 자연스러움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그 바탕 위에서 사람들이 자율적인 교환을 통해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본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그 어떤 다른 사회보다 더 나은 사회라는 것은 분명하다
권혁철 <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