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오해와 진실 (29) 시장규제론의 뿌리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문장이다. 허생원, 조선달, 동이 이렇게 세 사람이 봉평장을 보고 대화장에 가기 위해 밤길을 걷는 정경을 그린 것인데, 소설 시점은 1936년 여름이다. 지금은 여름 지나 추석이 코앞이지만 가을메밀이 한창이고 달빛은 청량하니 이 문장을 다시 읽고 음미해도 좋을 것이다. 소설 속 허생원의 직업은 5일장을 찾아다니며 장사하는 장돌뱅이다. 5일장은 하이에크의 표현을 빌리면 자생적 질서에 해당한다. 국가를 포함한 그 누구의 의도적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생존과 번영을 위한 교환 본능에 따라 사람들이 모여 시장이 형성되고, 처음에는 보름 또는 열흘에 한 번씩 장이 열리다 5일에 한 번으로 최적화한 것이다.
이 자생적 질서가 교묘하고 놀라운 것은 특정 지역의 장날을 중심으로 이웃하는 읍면에서 순차적으로 5일장이 열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소설 속 허생원처럼 장사꾼들은 오늘은 봉평장, 내일은 대화장, 모레는 제천장…그리고 닷새 후에는 다시 봉평장으로 돌아가며 장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다 교통이 편해서 사람이 더 많이 모이는 5일장은 상설시장으로 발전했다.
시골에 열리는 장이라 해서 향시(鄕市)라고도 했던 5일장이 정확히 언제부터 자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성종실록’에 기록이 있음을 볼 때 향시는 이미 15세기 중엽 적잖이 존재했던 듯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시장의 기능을 ‘유무상통(有無相通)’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유무상통이란 ‘내게 있는 것(有)을 가지고 내게 없지만 필요한 것(無)을 구한다’는 뜻이니 조선의 지배층은 시장의 순기능, 유용함을 제대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장에 대한 태도와 정책은 정반대였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철저한 신분차별 아래 상인과 공인은 금전적 이익만 좇는 무뢰배로 취급됐다. 오늘날 북한의 장마당처럼 특히 흉년, 기근이 들었을 때 백성이 연명하려면 시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았으면서도 조선의 정치인들은 틈만 나면 시장을 금압하려 했다.
이런 사실은 ‘중종실록’의 다음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1533년, 충청도 관찰사 소세양이 이르기를, 사를 게을리 하는 백성과 도둑질하는 무리가 모두 시장에 모입니다. 그래서 일체 금파(禁罷)하려 했지만 흉년에 백성들이 살아갈 것을 생각하여 한 달에 세 번만 시장에 나오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시장 개설을 ‘원칙 금지, 예외 허용’으로 접근했다는 것인데 중종은 이마저도 못마땅하다는 듯 ‘농업과 누에치기를 권하는 게 수령이 할 일’이라고 촌평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겠지만 조선의 정치인과 지식인은 시장 때문에 도적이 발생하고, 도적을 없애려면 시장 개설을 막아야 한다고 믿기도 했다. 대표적 사례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이언적의 논리다. 이언적은 1546년 올린 상소문에서 ‘근래에 기근이 들어 도적이 더욱 성한데/…/명화적(明火賊)이 날뛰면서 살인, 약탈을 꺼리지 않으니 이는 모두 시장을 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시장을 일절 금지하여 도적의 근심을 없애야 합니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이런 시장관은 서구와 정반대였다. 비슷한 시기, 서구 열국은 시장의 발전이 국부의 원천임을 깨닫고 경쟁적으로 시장 개설을 지원했다. 또 유한책임 원리에 기초한 주식회사를 고안해 고도의 위험이 수반되는 해양무역에도 적극 나섰다. 1653년, 하멜 일행을 태우고 제주도에 표류했던 선박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이었다. 하멜은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출장 가던 중 표류했던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하멜의 표류 사건을 서구의 새로운 경제조직과 운용방법을 배울 기회로 선용하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조선 지배층의 ‘시장 적대적 DNA’가 너무 확고했다. 하멜이 떠나고 한참 지난 1696년, 숙종이 ‘백성이 장사에 종사하는 것을 막고 다들 농사로 돌아가게 하라’며 팔도 감사에게 유시했다는 기록은 하멜 일행과의 조우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조선 후기에 와서도 시장에 적대적인 지배층의 인식과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물론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실학자들의 시장과 상업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그 당시 유학자 중에서는 분명 뛰어난 것이다. 그러나 실학자도 지주계급에 속했기 때문인지 백성이 토지에서 시장으로 대량 이탈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어떤 실학자는 시장이 열리는 날을 전국적으로 통일해 장돌뱅이가 생기는 것을 막고 너무 많은 사람이 상업에 종사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도 했다.
조선시대는 과거의 일이니 그렇다 하고 지금 정치인의 시장관, 경제관은 어떨까. 지금은 시장 때문에 도적이 생긴다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시장과 산업이 발전하려면 개인과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경쟁이 필수적임을 부인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원칙론일 뿐, 각론에 가면 이야기가 다르다. 예를 들어 지금의 ‘유통산업 발전법’에는 경쟁을 제한하는 규제 내용이 즐비하다. 대형마트 및 준대형 점포의 영업시간 제한과 의무휴업일 지정도 그렇지만 전통상업보존구역을 정해 그 경계로부터 1㎞ 안에서는 준대형 이상의 점포 개설을 못하게 하는 것은 심각한 경쟁 제약이다. 이것도 모자라 거리제한 규제를 2㎞로 늘려 전국 어디에서도 대형 점포가 신설되지 못하게 막겠다는 법안도 있다.
소비자인 국민의 관점에서 보면 사업자 간 경쟁은 치열하면 할수록 좋다. 그러나 유통산업 발전법은 정치논리에 의해 ‘경쟁규제법’으로 본질이 바뀌었다. 시장의 확산을 막으려는 조선시대의 정치논리, 반시장 DNA가 지금은 경쟁 확대를 막으려는 정치논리로 바뀌어 계승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황인학 <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