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잃은 내가 만난 운명의 Book
(36) 도메 다쿠오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하) 국부론
사회는 어떻게 번영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부는 인간을 기쁘게 하고, 빈곤은 인간을 슬프게 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부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그에 대한 인간들의 칭찬과 선망 때문이다. 가난은 가난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사회적 멸시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 사회적 멸시는 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앞서 설명한 사회적 동감의 작용이다.(36) 도메 다쿠오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하) 국부론
그런데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다. 인간은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지위가 자기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갖는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현명한 사람은 그것을 안다. 현명한 사람은 필요 이상의 부나 지위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마음의 평정과 기쁨을 추구한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어리석은 사람들은 보다 행복해지기 위해, 보다 큰 칭송을 받기 위해, 필요 이상의 부와 지위를 추구한다. 부와 지위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인간들은 경쟁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더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고, 개간하고, 건설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가 번영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더 많은 부가 더 큰 행복을 안겨 주리라고 믿는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스미스의 표현을 빌리면 ‘천성에 의한 기만’에 떠밀려, 사회는 번영하는 것이다.
사회의 번영에 따라 부와 지위를 독점하는 큰 부자가 생겨난다. 그렇지만 부자의 위장은 그의 욕망만큼 무한대하지 않다. 그는 거두어들인 밀을 그의 사치적 소비를 위해 하인, 마부, 정원사, 빵가게, 대장간, 푸줏간, 구둣방, 옷가게에 나누어주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부자의 이기심과 탐욕으로 증대한 소득은 모든 사람의 행복으로 골고루 배분된다. ‘도덕감정론’의 이 대목에서 스미스는 ‘보이지 않은 손’이란 구절을 단 한 차례 사용하고 있다. ‘국부론’에서도 ‘보이지 않은 손’이 한 차례 언급되는데, 같은 문맥에서다.
그런데 인간사회를 번영으로 이끄는 보다 큰 부를 위한 경쟁은 어디까지나 ‘공평한 관찰자’가 정한 정의의 규칙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소란, 동요, 강탈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혼란은 궁정 정치가를 비롯한 상류계층에 의해 자행된다. 그들은 아첨, 거짓말, 음모, 뇌물, 암살 등의 부정한 수법으로 특권과 독점을 추구한다. 반면에 중류와 하류 계층의 삶은 평생에 걸친 노동, 신중, 공정, 절제, 저축의 미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야말로 18세기 영국사회를 질서와 번영으로 이끄는 자연법의 주체들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스미스는 영국의 부패한 상류계층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스미스의 ‘국부론’은 이와 같은 ‘도덕감정론’을 토대로 부의 생산, 자본의 축적, 그리고 정부에 의한 과세의 원리, 곧 인간들의 경제생활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자연법을 추구한 것이다. 스미스는 부의 원천은 분업과 시장에 있다고 보았다. 영국의 하류 계층은 미개사회 추장보다 부유하다. 오로지 분업과 시장의 덕분이다. 분업과 시장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교환성향에 기초해 있다. 교환의 기초는 타인의 동감이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물건이 얼마나 상대방에 이로운지를 설득함으로써 교환을 성공시킨다.
여기서 스미스의 그 유명한 말이 이어진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과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이 아니라 그들의 자애심(自愛心)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유리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장이라는 것은 동감, 설득, 교환성향, 그리고 자애심이란 인간 본성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호혜적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스미스는 사회의 ‘공평한 관찰자’가 제정한 정의의 규칙에 입각한 공정거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거래의 질서가 공정하여 제품의 질을 높이고 좋은 평판을 얻으면 정당한 보수가 따른다는 전망이 설 때 비로소 분업이 촉진되고 시장이 활성화한다. 그렇지만 영국의 상류계층은 각종 특권과 독점으로 부당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분업과 시장의 발전을 저해하며, 결국 영국 경제의 발전을 억누를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스미스는 당시 영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아메리카 식민지도 과감하게 포기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것은 영국 경제의 발전을 이끄는 자연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군사력을 동원해서 아메리카를 억지로 식민지로 잡아두지 않더라도, 영국은 자유무역을 통해 아메리카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식량과 자원을 풍족하게 확보할 수 있다. 영국 정부가 스미스의 이 같은 주장에 따라 아메리카의 독립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영국 경제는 식민지 독립을 허용한 후 19세기에 걸쳐 더욱 번성하였다. 스미스가 이런 반제국주의 주장을 이미 18세기에 그의 조국을 향해 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앞서 지적한 대로 19세기까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근대 서유럽과는 상이한 문명을 영위하였다. 그 전통 문명이 19세기 후반 서유럽 제국주의의 충격을 맞아 해체되었다. 이후 20~21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와 현실은 전통 문명을 자기류(自己流)로 재건, 재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사회의 질서와 번영을 이끄는 기본 원리는 무엇인가? 18세기 영국의 스미스가 부딪혔던 이 같은 물음에 한국 사회는 아직도 서툴기만하다.
돌이켜 생각해보라. 그런 질문을 받고 대답을 모색해 본 적이 있는지. 한국 사회가 자기 몸에 맞는 질서와 번영의 원리를 모색하는 작업은 전통을 부활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서유럽 기원의 근대문명과 조화로운 융합이 필요하다. 그것의 정수를 훌륭하게 집약한 도메의 ‘지금 다시 애덤 스미스를 읽는다’를 정독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이영훈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