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중학교가 ‘공정무역카페’에서 한 일
“이렇게 더운 날에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니 너무 좋네요. 이런 행사가 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시 강동구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서울명일중학교는 지난 7월 16일부터 17일까지 2일간 학생회를 중심으로 일일카페를 운영했다. 일일카페는 단순히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행사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기획됐다. 판매 물건들은 아이스크림 4품목을 제외하고 모두 공정무역 제품이다. 또한 벌어들인 이윤은 100% 지역 ‘홀몸 어르신’들을 위해 기부될 예정이다. 공정무역(Fair Trade)은 말 그대로 부당하거나 불공평하지 않은 것 거래를 말한다. 즉 생산자들에게 일한 만큼의 대가는 지불해주는 재화나 서비스의 소유권 이동이다. 초콜릿, 축구공, 팔찌, 면 제품, 커피 등 다양한 공정무역 제품들 중 주최 학교측에서는 초콜릿과 커피, 그리고 사탕수수 원당으로 만든 흑설탕 캔디를 판매하기로 정했다. 운영 방식에서도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19명으로 구성된 학생회가 주축이 되어 각 부서에 해당하는 대의원들과 함께 정해진 시간대별로 물품을 판매하는 구조로 돌아갔다. 학생회 임원들은 물론 각 반의 대의원들도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일일카페의 결과물은 놀라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 라떼, 아이스 모카, 그리고 아이스 캐러멜 마키야토는 준비한 샷 300잔 모두 매진됐다. 아이스크림은 재고가 없어 추가주문을 했다. 흑설탕 캔디도 첫 점심시간 다 팔렸다. 총 이익은 221만1000원 이었다. 재료비를 뺀 순이익은 77만 2000원에 달했다. 이번 명일중학교 공정무역 일일카페는 다방면에서 학생 자치활동의 힘을 보여 주었다. 학생회 19명을 중심으로 대의원 52명이 움직였고, 기획부터 물품 선택, 업체 선정, 판매 등 전 과정을 학생들이 도맡아 했다. 수익금 일부는 장학금으로 기부됐고 나머지는 모두 지역 독거노인을 위해 쓰였다.
최영돈 생글기자(명일중 3년) 0831choi@naver.com
입시 쿼터제…올바른 제도인가
입시쿼터제란 입시제도에서 대학 입학 기준이 특정 부분, 집단 또는 개인에 대하여 제한을 가하는 것이다. 입시쿼터제는 수많은 나라들이 도입한 제도이고 우리나라도 이미 많은 대학이 시행 중에 있다. 2005년 당시 정운찬 서울대 총장의 “2008년까지 지역균형선발제를 30%로 확대하겠다”라는 발언으로 불거졌던 입시쿼터제의 찬반논쟁은 지금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 배려와 사교육 근절 등의 허울 좋은 명목으로 대두된 대학입시 쿼터제는 근본적으로 사회 소외층들의 이권을 대변할 수 없으며 갖은 사회적 부작용들을 초래할 뿐이라는 회의적 목소리가 더 두드러진다.
첫째로, 대학입시 쿼터제는 입시의 공정성을 훼손하고 역차별문제를 야기한다. 이는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헌법정신에 위배되며 헌법 31조 1항에 의거,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에서 능력이 아닌 인종, 지역 등의 기준으로 세운 입시정책은 자유경쟁원칙을 무시한 정책이다. 또한 대도시 저소득층 자녀들은 이중적 역차별 문제를 겪을 것이며 더 실력 있는 사람이 불이익을 감내해야한다면 이는 평등을 위한 입시제도라고 할 수 없다.
둘째로, 입시 쿼터제는 대학교와 사회 발전에 긍정적 효과를 미치지 않는다. 대표적 입시쿼터제이자 중심화두인 지역균형선발제의 경우 지방 인재들의 서울 진입을 촉진시켜 지방 대학의 황폐화를 가속한다. 즉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명목으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교육격차를 벌려놓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역마다 할당되는 기준이 모호하며 편법입학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입시 쿼터제는 사회 통합에 기여하지 못하며 사회계층 이동의 근본적 사다리가 될 수 없다. 입시쿼터제는 지방학교학생들의 과잉경쟁, 그에 따른 또 다른 사교육 시장 확대 문제를 안고 있으며 소외계층 중 소수가 명문대에 입학한다고 해서 계층이동이 자유롭다고 말할 수도 없다. 교육 수준 격차를 좁히는 진정한 사회통합과 사교육의 팽창을 억제하는 정책은 지방의 학생들을 서울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 그만큼 우수한 대학을 설립하는 것과 대학입시의 길을 더 폭넓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길의 기준은 지역, 성별이나 인종 따위가 아닌 더 고차원적인 능력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김영민 생글기자(휘문고 2년) kim980317@gmail.com
세계문화유산이 되기 위한 조건
일본 메이지 산업 혁명 유산인 근대 산업 시설 23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3곳의 산업 시설 중 7곳이 6만 여명의 조선인이 강제노역을 겪은 강제 징용 시설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와 일본 정부는 등재 결정문에 “1940년대 몇몇 시설에서 많은 한국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끌려와 가혹한 환경에서 일하기를 강요받았다(forced to work)”라는 말을 포함시키기로 합의했고, 세계유산위원회는 등재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세계 유산으로 등재가 되자마자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의 강제 노역 사실을 부인하였고 논란이 일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일본 유학생인 주인공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중 배 안의 목욕탕에서 일본인들의 대화를 듣는다.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돈 버는 방법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실상은 누워서 떡먹기지. 나두 이번에 가서 해오면 세 번째나 되오마는, 내지(일본)의 각 회사와 연락해가지고 조선인을 붙들어오는 것인데, 즉 조선 쿨리(하급 노동자) 말씀요.”
주인공은 ‘그 불쌍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과 광산으로 몸이 팔려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에 빠져서 속아 넘어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현실에 절망한다. 소설 작품 속에도 나타나듯이 일제 강점기에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노동으로 고통 받았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일본의 공장, 토목 공사장, 광산 등에서 집단 노동을 해야 했고, 1938년에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여 국민 징용령을 실시되었고 1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었다.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며 덮으려고만 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올바르지 못하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역사의 매듭을 올바르게 지어야 올바른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일본은 근대 산업 시설을 일본 근대화와 경제 성장의 장소라고만 선전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문화 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강제 노역 사실을 인정하여 강제 징용 시설에서 일어났던 인간의 존엄성 부정의 비극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역사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고은호 생글기자(영신여고 2년) rhdmsgh2@naver.com
아물지 않은 고통, 우리는 기억해야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해방 70주년을 앞둔 지금, 아직도 마음만은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다. 위안부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부터 해방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위안소에 강제 징용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들을 지칭한다.
위안소의 여성들은 하루 60~70명 가량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위안부에서는 1주 혹은 2주일에 한 번 건강검진을 시행했는데 이조차 성병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생존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위안부의 연령대는 적게는 12살, 많으면 20살이 넘었다 한다.
해방 후에도 피해자들은 쉽게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면목이 없어 가지 못했다’ 등이 그 이유였다. 현재 귀국한 생존 피해자들의 평균 연령대는 어느덧 80을 넘겼다. 피해 생존자의 수는 50명을 넘지 않는다. 1992년부터 현재까지 매주 수요일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 1200회에 가까운 시위는 기네스북에 기록 된지도 오래다. 하지만 이 기네스북 기록을 기분 좋게 여길 수 없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일본 당국의 공식적인 사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대한민국 거주자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실명으로 증언한 고(故) 김학순 할머니는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미래를 위해, 또 고통 받았던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우리는 계속 기억해야 한다.
김영민 생글기자(정의여고 1년) kymin1027@naver.com
“이렇게 더운 날에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니 너무 좋네요. 이런 행사가 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시 강동구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서울명일중학교는 지난 7월 16일부터 17일까지 2일간 학생회를 중심으로 일일카페를 운영했다. 일일카페는 단순히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행사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기획됐다. 판매 물건들은 아이스크림 4품목을 제외하고 모두 공정무역 제품이다. 또한 벌어들인 이윤은 100% 지역 ‘홀몸 어르신’들을 위해 기부될 예정이다. 공정무역(Fair Trade)은 말 그대로 부당하거나 불공평하지 않은 것 거래를 말한다. 즉 생산자들에게 일한 만큼의 대가는 지불해주는 재화나 서비스의 소유권 이동이다. 초콜릿, 축구공, 팔찌, 면 제품, 커피 등 다양한 공정무역 제품들 중 주최 학교측에서는 초콜릿과 커피, 그리고 사탕수수 원당으로 만든 흑설탕 캔디를 판매하기로 정했다. 운영 방식에서도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19명으로 구성된 학생회가 주축이 되어 각 부서에 해당하는 대의원들과 함께 정해진 시간대별로 물품을 판매하는 구조로 돌아갔다. 학생회 임원들은 물론 각 반의 대의원들도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일일카페의 결과물은 놀라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 라떼, 아이스 모카, 그리고 아이스 캐러멜 마키야토는 준비한 샷 300잔 모두 매진됐다. 아이스크림은 재고가 없어 추가주문을 했다. 흑설탕 캔디도 첫 점심시간 다 팔렸다. 총 이익은 221만1000원 이었다. 재료비를 뺀 순이익은 77만 2000원에 달했다. 이번 명일중학교 공정무역 일일카페는 다방면에서 학생 자치활동의 힘을 보여 주었다. 학생회 19명을 중심으로 대의원 52명이 움직였고, 기획부터 물품 선택, 업체 선정, 판매 등 전 과정을 학생들이 도맡아 했다. 수익금 일부는 장학금으로 기부됐고 나머지는 모두 지역 독거노인을 위해 쓰였다.
최영돈 생글기자(명일중 3년) 0831choi@naver.com
입시 쿼터제…올바른 제도인가
입시쿼터제란 입시제도에서 대학 입학 기준이 특정 부분, 집단 또는 개인에 대하여 제한을 가하는 것이다. 입시쿼터제는 수많은 나라들이 도입한 제도이고 우리나라도 이미 많은 대학이 시행 중에 있다. 2005년 당시 정운찬 서울대 총장의 “2008년까지 지역균형선발제를 30%로 확대하겠다”라는 발언으로 불거졌던 입시쿼터제의 찬반논쟁은 지금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 배려와 사교육 근절 등의 허울 좋은 명목으로 대두된 대학입시 쿼터제는 근본적으로 사회 소외층들의 이권을 대변할 수 없으며 갖은 사회적 부작용들을 초래할 뿐이라는 회의적 목소리가 더 두드러진다.
첫째로, 대학입시 쿼터제는 입시의 공정성을 훼손하고 역차별문제를 야기한다. 이는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헌법정신에 위배되며 헌법 31조 1항에 의거,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에서 능력이 아닌 인종, 지역 등의 기준으로 세운 입시정책은 자유경쟁원칙을 무시한 정책이다. 또한 대도시 저소득층 자녀들은 이중적 역차별 문제를 겪을 것이며 더 실력 있는 사람이 불이익을 감내해야한다면 이는 평등을 위한 입시제도라고 할 수 없다.
둘째로, 입시 쿼터제는 대학교와 사회 발전에 긍정적 효과를 미치지 않는다. 대표적 입시쿼터제이자 중심화두인 지역균형선발제의 경우 지방 인재들의 서울 진입을 촉진시켜 지방 대학의 황폐화를 가속한다. 즉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명목으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교육격차를 벌려놓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역마다 할당되는 기준이 모호하며 편법입학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입시 쿼터제는 사회 통합에 기여하지 못하며 사회계층 이동의 근본적 사다리가 될 수 없다. 입시쿼터제는 지방학교학생들의 과잉경쟁, 그에 따른 또 다른 사교육 시장 확대 문제를 안고 있으며 소외계층 중 소수가 명문대에 입학한다고 해서 계층이동이 자유롭다고 말할 수도 없다. 교육 수준 격차를 좁히는 진정한 사회통합과 사교육의 팽창을 억제하는 정책은 지방의 학생들을 서울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 그만큼 우수한 대학을 설립하는 것과 대학입시의 길을 더 폭넓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길의 기준은 지역, 성별이나 인종 따위가 아닌 더 고차원적인 능력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김영민 생글기자(휘문고 2년) kim980317@gmail.com
세계문화유산이 되기 위한 조건
일본 메이지 산업 혁명 유산인 근대 산업 시설 23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3곳의 산업 시설 중 7곳이 6만 여명의 조선인이 강제노역을 겪은 강제 징용 시설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와 일본 정부는 등재 결정문에 “1940년대 몇몇 시설에서 많은 한국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끌려와 가혹한 환경에서 일하기를 강요받았다(forced to work)”라는 말을 포함시키기로 합의했고, 세계유산위원회는 등재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세계 유산으로 등재가 되자마자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의 강제 노역 사실을 부인하였고 논란이 일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일본 유학생인 주인공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중 배 안의 목욕탕에서 일본인들의 대화를 듣는다.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돈 버는 방법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실상은 누워서 떡먹기지. 나두 이번에 가서 해오면 세 번째나 되오마는, 내지(일본)의 각 회사와 연락해가지고 조선인을 붙들어오는 것인데, 즉 조선 쿨리(하급 노동자) 말씀요.”
주인공은 ‘그 불쌍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과 광산으로 몸이 팔려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에 빠져서 속아 넘어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현실에 절망한다. 소설 작품 속에도 나타나듯이 일제 강점기에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노동으로 고통 받았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일본의 공장, 토목 공사장, 광산 등에서 집단 노동을 해야 했고, 1938년에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여 국민 징용령을 실시되었고 1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었다.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며 덮으려고만 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올바르지 못하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역사의 매듭을 올바르게 지어야 올바른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일본은 근대 산업 시설을 일본 근대화와 경제 성장의 장소라고만 선전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문화 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강제 노역 사실을 인정하여 강제 징용 시설에서 일어났던 인간의 존엄성 부정의 비극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역사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고은호 생글기자(영신여고 2년) rhdmsgh2@naver.com
아물지 않은 고통, 우리는 기억해야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해방 70주년을 앞둔 지금, 아직도 마음만은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다. 위안부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부터 해방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위안소에 강제 징용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들을 지칭한다.
위안소의 여성들은 하루 60~70명 가량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위안부에서는 1주 혹은 2주일에 한 번 건강검진을 시행했는데 이조차 성병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생존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위안부의 연령대는 적게는 12살, 많으면 20살이 넘었다 한다.
해방 후에도 피해자들은 쉽게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면목이 없어 가지 못했다’ 등이 그 이유였다. 현재 귀국한 생존 피해자들의 평균 연령대는 어느덧 80을 넘겼다. 피해 생존자의 수는 50명을 넘지 않는다. 1992년부터 현재까지 매주 수요일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 1200회에 가까운 시위는 기네스북에 기록 된지도 오래다. 하지만 이 기네스북 기록을 기분 좋게 여길 수 없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일본 당국의 공식적인 사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대한민국 거주자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실명으로 증언한 고(故) 김학순 할머니는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미래를 위해, 또 고통 받았던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우리는 계속 기억해야 한다.
김영민 생글기자(정의여고 1년) kymin102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