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피케티에 열광하십니까?

[생글기자 코너] 아직도 피케티에 열광하십니까? 등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가 저서 ‘21세기 자본’의 오류를 시인했다. 그의 이론이 21세기 부의 불평등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원인이 ‘자본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크기 때문’이라 주장한 바 있다. ‘21세기 자본’에 사용된 통계의 정확성 여부도 도마에 올랐다. 피케티가 사용한 통계는 일부 조작, 변경된 것으로 드러나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

피케티의 기본 입장은 부의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붕괴시키고 세습 자본주의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세 가지 법칙을 제시한다. 제 1법칙은 자본 스톡과 자본 수익률 간의 관계다. 피케티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은 스스로 수익을 낼 수 있다. 제2 법칙은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경제 성장률이 하락한다는 것이다. 경제 성장률에 비해 저축률이 증가하면서 불평등은 심화된다. 제3 법칙은 ‘21세기 자본’의 중심축을 이룬다. 피케티는 자본 수익률이 경제 성장률보다 높다는 것을 주장하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한다. 세습된 자본에 대한 수익률이 더 높아서 자본을 소유한 사람은 더 많은 부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자본 수익률의 증가는 ‘세습 자본주의’를 초래하여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피케티는 부의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높은 세금을 제안한다. 부유층의 소득 80%를 거두어 재분배함으로써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금 부담으로 인한 자본의 해외 이탈에 대비해 ‘글로벌 세금’을 제안하기도 한다. 글로벌 세금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세금을 부과하는 과세 형태다. 높은 부유세와 글로벌 세금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피케티의 주장은 철저한 정부 개입주의적 성격을 띤다.

피케티의 세 3가지 법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질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오류가 있다. 피케티는 자본주의가 지속될수록 부유층에 부가 편중된다고 말한다. 부의 편중은 ‘부익부 빈익빈’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틀린 주장이다. 자본주의는 국가의 절대적 소득수준을 높인다. 1960년의 대한민국과 현재의 대한민국을 비교해보면 현재에 비해 1960년대의 불평등 지수가 낮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1960년의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의 불평등 지수는 낮았으나 국가 전체가 빈곤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전자에 비해 불평등지수는 심화됐으나 절대 빈곤에서 탈출했다. 누구나 선진 문명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불평등의 원인에 대한 분석 역시 오류가 있다. 피케티는 제3 법칙에서 ‘자본 수익률>경제 성장률’이 성립하기 때문에 불평등이 심화된다고 본다. 시간이 지나면 자본이 늘어난다는 피케티의 주장은 틀렸다. 자본은 플로(flow) 개념이다. 스톡(stock)을 전제로 수익률을 계산할 수 없으므로 자동적으로 수익을 낼 수도 없다. 자본은 세금, 환율, 운 등 외부 변수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자본가는 언제나 리스크 속에 놓여 있다. 자본은 자본가가 자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자본은 투자되면서 이익과 손실을 반복한다. 상속도 마찬가지다. 피케티는 자본이 상속되면서 부가 고착된다고 본다. 하지만 상속되는 것은 자본에 한정된다. 자본 이득이 상속돼도 상속인의 노력이 없으면 부는 유지될 수 없다.

한국이 ‘21세기 자본’에 열광하는 이유는 불평등 인식에 있다. 많은 사람은 부유층의 부가 중산층 또는 저소득층을 착취해서 얻은 결과라 생각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착취’는 없다. 부의 획득은 개인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다. 대한민국의 소득 수준이 절대적으로 증가했음에도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상대적 빈곤이 강한 한국에서 ‘21세기 자본’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21세기 자본’의 핵심은 ‘평등’이다. 경제적 평등은 모두가 가난한 사회를 만들어갈 뿐, 경제 성장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피케티가 오류를 시인했음에도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피케티 추종자’들이 많다.

황단비 생글기자(신도고 3년) 97baker.st@gmail.com

학교에서 독서시간 의무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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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사람들의 불변의 공통점이 ‘독서’일 정도로 독서는 중요하다. 독서를 통해 사고력을 향상시키고 사고의 폭을 확장시켜 세상을 보다 더 넓고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집중력과 어휘력을 높여주는 것은 물론 타인이 경험한 것을 간접체험할 수 있게 해주며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최근 발표한 지난 5년간 하루 평균 독서시간은 평일 26분으로 조사됐다. 인터넷은 2.3시간, 스마트폰 1.6시간인 것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또한 국민독서실태 조사 결과 성인 1인당 연간 독서량이 9.2권(월 0.76권)이다. 성인 10명 중 3명은 1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다른 선진국들의 독서 라이프사이클은 한국과는 정반대이다. 한국에서는 유아나 초등학교 때 책을 많이 접한다면 영국에서는 30대 이상 성인의 30%가 매일 책을 읽는다고 답했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IFOP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들은 휴가기간에 TV시청이나 인터넷서핑을 평소보다 1시간씩 줄이고, 독서에는 25분씩 늘어난 2시간14분을 매일 할애한다.

이런 독서행태의 차이는 책을 읽지 않으면 대학에 들어갈 수도, 졸업할 수도 없는 선진국의 교육구조의 영향과 더불어 독서 ‘목적’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중학생을 위한 국어어휘력 만점 공부법’, ‘이것이 진짜 공부다’, ‘고전은 나의 힘’, ‘10대를 위한 유쾌한 토론교과서’. 앞에 나열된 이 책들은 현재 청소년 베스트셀러에 포진되어 있는 책들이다. 우리나라 청소년은 고전을 이해하고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보다 국어 단어와 고전을 외우고 토론 꼼수와 공부기술을 배우는 것이 독서의 목적인 것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가 청소년 베스트셀러이다. 말기 암 환자인 두 청소년이 ‘우리는 이 세계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라며 삶과 죽음에 대해 던지는 고민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책을 안 읽는 것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교육과 기업에서 스펙과 스킬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무적으로라도 수업시간 중 일부를 읽고 질문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문학 등 국어수업시간에는 발췌본이 아닌 책 전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기업은 객관식 시험이 아닌 얼마나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논술로 평가해야 한다.

신지수 생글기자(대전신일여고 3년) s_linhu@hanmail.net

톨스토이가 물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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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데일리 메일은 유명 유투브 채널 라이프 헌터가 네덜란드 미술관에서 찍은 ‘미술 작품 감정가 실험’영상을 소개했다. 이 미술관의 이름은 네덜란드 아르험 미술관(Dutch Arnhem Museum)으로 수백억원에 호가하는 그림만 걸린다고 유명한 곳이다. 진행자는 낮은 가격에 구매한 그림을 그곳에 가져다 놓고 사람들에게 평가를 부탁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칭찬만 늘어놓았다. ‘디테일한 묘사가 마음에 든다’ ‘믿기지 않는다’ ‘작가의 감정이 풍부하게 묘사된 것 같다’는 반응이 주류다.

진행자가 이어서 그들에게 “가격이 얼마 정도 될 것 같은가”라고 물어보자 110만원부터 30억원까지 폭넓은 범위로 고가가격이 오르내렸다.

싸구려 가방이 순식간에 명품백이 되는 듯한 순간이었다. 마지막에 진행자가 이 그림의 원래 가격을 밝히자 자신이 높게 평가한 이 그림이 원래 낮은 가격이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당황해 돌아가거나 민망함에 웃음만 터뜨렸다.

‘부자들은 예술을 얘기하고 예술가들은 돈을 얘기한다.’ 톨스토이의 비평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의 한 대목이다. 나는 이 말이 현재 미술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미술, 나아가 예술의 가치를 과연 무엇으로 평가하고 있을까. 정말로 그 안에 담긴 뜻, 혹은 표현에 사로잡힌 것인지, 옆에 붙여진 가격표를 보고 자신이 얼마나 감동하고 칭찬할지가 결정되는지. 사람들이 엔디 워홀의 작품을 보고 명작 중의 명작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가 단지 유명해서가 아닌지, 미술 감상은 그저 자신의 미덕을 높게 보이기 위한 수단인지, 액자에 금이 칠해진 듯 높은 가격의 ‘명화’ 들을 볼 때마다 필자도 다른 사람들처럼 감동하고 가격에 걸맞은 그림이라며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지 고민된다. 예술, 미술 그것은 자유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높은 가격에 그림을 사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림은 자유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평가와 느끼는 바는 주관적일 수 있으며 가치 또한 그것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가격과 유행을 따라 평가되는 예술의 가치가 과연 옳은 것인가 생각해 봐야 할 때 같다.

오명인 생글기자(대전신일여중 3년) om262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