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경제의 만남 (68)
언어마다 특정 개념을 구분해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경우가 있는데, ‘위험’이라는 단어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danger, risk, hazard 등은 우리말로는 모두 위험으로 번역되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이들 단어는 지칭하는 위험은 상이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Danger의 경우에는 우리 인간이 통제하거나 관리할 수 없는 위험을 지칭한다. 대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라든가 해성 충돌과 같은 위험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Risk는 인간이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통제 가능한 위험을 지칭한다. 우리는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집에 불이 날 수도 있으며,갑자기 큰 병에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한 위험인 risk에 해당한다.통제 가능한 위험 관리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그동안 통제 가능한 위험(risk)을 어떻게 관리해 왔을까? 우리는 통제 가능한 위험에 대해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먼저 위험을 회피하거나 줄여보려는 태도다. 즉 위험을 발생시킬 수 있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안 하거나 되도록 그런 행위를 줄이는 것이다.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어두운 밤길은 피한다든지, 공사 중인 건물 밑은 피해서 돌아가는 행위 등은 위험을 회피하려는 태도이며,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방범창을 설치한다든지, 외출할 때 가스 불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확인하고 나가는 행위 등은 위험을 줄이려는 행위에 해당한다.
이와 달리 앞으로 닥칠지 모를 위험이 발생했을 때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가질 수도 있다. 위험한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은 오히려 위험을 선호하는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지만, 위험한 레포츠를 즐기는 과정에서 본인들에게 발생할 수도 있는 안전사고 등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태도 또한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위험한 일을 당했을 때, 발생할 손실을 줄이는 방식으로 위험에 대응하려는 태도가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위험에 대응하는 방법 중 하나가 보험이다.
보험이란 사고를 당할 위험성이 있는 다수의 사람이 미리 금전을 갹출해 준비해 두었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돈을 모아 주는 경제제도를 말한다. 우리는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자신에게 발생할 손실을 줄이기 위해 자동차보험에 가입하고 있으며, 갑작스럽게 큰 병을 얻어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각종 의료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들은 자신에게 실제로 위험이 발생했을 때 그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일련의 행위들이라 말할 수 있다.
중세 ‘길드’·계모임 등 보험의 유례
위험이 발생했을 때 입게 되는 손실을 줄이기 위한 욕구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기에 그만큼 보험의 유례도 오래됐다. 기원전에는 사고를 당하거나 천재지변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사람을 서로 도와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역시 일종의 보험 형태라 볼 수 있다. 중세에는 동종업계의 사람들이 길드(guild)를 조성해 항해 도중 선박이나 화물에 손해가 발생할 경우 공동으로 부담해주기도 했으며 길드 구성원이 사망이나 도난 등의 재난을 당할 경우 함께 구제해주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오래전부터 다양한 종류의 계(契)가 형성돼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함과 동시에 계의 구성원 중에서 집안 경조사가 발생하거나 기타 금전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생길 경우 다른 구성원들이 금전적으로 도와주는 풍습이 형성된 바 있다. 이 역시 일종의 보험 역할을 담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인류는 오래전부터 위험으로 인한 손실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보험을 활용해 왔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보험상품을 이용한다. 보험은 위험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 대상이 사람이냐 물건이냐에 따라 크게 생명보험과 손해보험으로 구분한다. 먼저 생명보험이란 사람의 사망과 질병을 대비할 뿐만 아니라 인생주기를 거치면서 발생하는 생활자금,주택마련 자금,교육비,노후 생활자금 등을 대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보험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생명보험은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기능뿐만 아니라 재산을 마련하는 저축 기능도 가지고 있다. 반면 손해보험이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나 재산상에 손해가 발생했을 때, 혹은 다른 사람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쳤을 경우에 대비하기 위한 보험이다.
새로운 보험상품 개발 ‘계리사’
그렇다면 이러한 보험상품은 누가 만든 것일까? 바로 보험계리사다. 보험계리사의 주된 업무는 새로운 보험 상품을 개발하는 일과 적정 보험료나 적정 보상금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적정 보험료를 산출하거나 신규 보험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손익을 계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망률, 사고율, 질병률, 금리와 같은 각종 통계 자료를 활용해 미래의 변화도 예측하고 위험을 진단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보험 관련 법규에 대한 지식도 함께 겸비해야 한다. 보험계리사에 고도의 수학과 통계학 및 재무이론을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험계리사는 고도의 수학적·통계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과 관련된 일화다. 평소 수학에 소질을 보였던 대학 재학 시설 보험계리사 시험에 응시했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보험계리사 시험에 떨어졌고, 이후 낙심한 그는 경제학자로 진로를 변경해 1932년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고는 훗날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보험계리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금융감독원에서 시행하는 1차 및 2차 시험에 합격하고 일정 기간 수습을 거친 뒤 금융감독원에 등록함으로써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1차 시험 과목은 보험 관련 법규, 경제학, 보험수학, 회계원리, 영어로 구성돼 있으며, 2차 과목은 리스크관리, 보험 및 연금 수리학, 금융공학 등으로 구성돼 있다.
최근 국내외적으로 보험사의 핵심 인력인 보험계리사 숫자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이는 상품개발 자율성 확대로 전문인력인 계리사의 역할이 중요해졌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최근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 흐름에 맞춰 불확실한 위험에 대비하고자 하는 필요가 더욱 늘고 있기 때문이다. 보험계리사는 2014년 미국 직업정보 사이트인 커리어캐스트(CareerCast.com)에서 최고의 직업 중 4위를 기록하기도 했을 만큼 국내외적으로 유망한 직업이다. 수학과 통계 등에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라면 계리사를 꿈꿔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 보험
미래에 발생할 질병, 사고 등의 위험에 대비하는 투자 방법이다. 일정 기간 보험료를 납부해 위험 발생 시에는 보험금으로 피해를 줄일 수 있게 해준다.
■생명보험과 손해보험
생명보험은 사망, 질병 등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이 발생했을 때 이를 보상해주는 보험이다. 손해보험은 사고로 재산에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 이를 보상해준다. 화재보험, 자동차보험, 도난보험 등이 손해보험에 해당한다.
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