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4)
(1) 한반도에 인간이 살기 시작하다
(2) 신석기 혁명, 농사를 짓다
(3) 고조선은 살아있다…유네스코 세계유산 '고인돌'
(5) 고구려,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다
(6) 한반도 남쪽으로 눈을 돌린 장수왕…
우리는 언제부터 ‘대한(大韓)사람’이었을까요? 그것은 1897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부터입니다. 고종 황제는 ‘한(韓)’이라는 이름이 바로 우리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 옛 마한, 진한, 변한 등의 삼한을 아우른 것이라 ‘큰 한’ 즉 ‘대한(大韓)’이라고 정했습니다. 아, 그렇다면 대한(大韓)이란 옛 삼한에서 유래한 것이군요. 삼한은 기원전 2세기부터 훗날 기원후 4세기 백제에 의해 마한이 무너지기까지 무려 500여년 동안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있었던 국가들입니다.(1) 한반도에 인간이 살기 시작하다
(2) 신석기 혁명, 농사를 짓다
(3) 고조선은 살아있다…유네스코 세계유산 '고인돌'
(5) 고구려,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다
(6) 한반도 남쪽으로 눈을 돌린 장수왕…
단, 이 국가들을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강력한 왕권과 중앙집권 통치를 실시한 국가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마한은 54국, 진한은 12국, 변한은 12국 등 무려 78개의 여러 작은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놀랍지요?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여러 문헌을 찾으며 이 작은 국가들도 정말 ‘국가’에 해당하는 건지, 아니면 읍락과 같은 작은 규모의 마을을 말하는 건지 연구하고 있답니다. 그 결과 여러 소국은 신지, 읍차라는 군장들이 있었으며 마한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삼한 전체를 대표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또한 이렇게 많은 국가들이 어떻게 연맹을 맺거나 아니면 경계를 이루고 살았는지 알 수 없어 여러 가지 자료를 찾고 있답니다. 그래서 최근엔 진한과 변한의 경계가 오늘날의 국경 개념과 달리 서로 섞여 살고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고조선을 계승한 삼한
그렇다면 삼한의 역사에서 가장 확실한 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들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고려 전기의 역사가 김부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박혁거세의 건국 이전에 이미 고조선의 유민들이 산과 골짜기에 나뉘어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중국의 역사서에는 위만에 나라를 뺏긴 고조선의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韓) 땅에 거주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결국 삼한은 고조선을 이은 국가들이자 바로 우리 민족을 ‘한민족(韓民族)’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원형이지요.
고고학적으로는 초기 철기 시대, 또는 미술사학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기 직전이거나 함께 존재하여 ‘원(原)삼국 시대’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실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사용하던 초기 철기 시대의 유물인 세형동검과 철제 도끼, 끌 등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발견되었답니다.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유물이 다수 발견된 것이지요. 그 후 변한의 철은 매우 많이 생산되고 명성이 높아 왜와 낙랑에 수출되기도 합니다.
깍두기 마냥 잘라 나눌 수 없는 역사
역사란 이전에도 말씀드렸듯, 깍두기 마냥 잘라 나눌 수 없으며 이전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면면히 이어지는 것입니다. 실제 마한은 훗날 백제에, 진한은 신라로, 변한은 가야로 흡수 또는 발전하게 됩니다. 단, 마한의 경우는 4세기까지 백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문화를 유지하였습니다.
그 증거로 옹관묘를 들 수 있어요. 항아리모양이라 ‘독무덤’이라고도 하는데요. 주로 어린아이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두 개의 항아리를 이어 만든 무덤이랍니다.
특히 영산강 유역의 마한 소국이 있었던 유적에서는 4세기의 옹관묘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때론 우리는 백제가 마한을 흡수, 병합한 것만 강조해서 배우는데, 반대로 4세기까지 여전히 마한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란 때로 비주류나 독자적 소수 문화도 소중하게 여기며, 그 속에서 과거의 또 다른 모습을 찾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오리, 하늘을 날다
삼한은 일찍부터 벼농사를 지었답니다. 저수지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벼농사를 발전시키기도 했지요. 또한 5월 씨뿌리기가 끝나면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10월 추수 후에도 제사를 지냈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이 제사는 한마디로 축제였답니다. 수십 명이 떼를 지어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추며 음주가무를 며칠간 즐겼다고 합니다. 우리 한민족은 삼한에서부터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땐 또 제대로 놀 줄 아는 민족이었던 걸까요? 한편, 제정일치의 단군 조선과 달리 삼한에는 제사장인 천군이 별읍인 소도에 거주하며 종교 의식을 주관했다고 하네요. 이 소도는 신성한 곳이라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치면 잡을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소도 입구에는 긴 나무 막대 위에 새를 조각한 솟대를 세워 신성한 지역임을 알렸다고 합니다.
왜 하필 새였을까요? 삼한의 무덤에서는 오리 모양 토기와 새 모양 목기 등이 출토되기도 합니다. 진한과 변한은 제사 의식에서 새의 깃을 묻었다고도 합니다.
이를 통해 역사학자들은 삼한에서 새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존재로, 죽은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영적인 존재로 여겼다고 추정합니다. 흥미롭게도 새 또는 날개는 고대 동서 문명에서 영적인 상징이었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헤르메스가 늘 신고 있는 날개 달린 장화,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의 황금 관에 새겨진 새, 시베리아 지역의 샤먼(제사장)이 머리에 쓰는 관에 장식된 새 깃털 등에도 모두 새가 상징적으로 등장합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우리나라 농경문 청동기에도 머리에 깃을 꽂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요. 삼한 이후 진한을 계승한 신라의 금관과 은관에서도 새 깃털 문양의 장식이 보입니다.
최근 미술관이나 여행지 등에도 세워진 솟대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삼한의 오리는 진짜 하늘로 날아가 죽은 영혼을 인도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