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2040만원의 거금을 투입하여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사업은 매우 방대하여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해 소유권을 조사하여 국유인지 민유인지, 그리고 민유이면 누구의 소유인지를 판정하였으며, 지세를 부과하기 위한 기준으로 결부제를 폐지하고 과세 지가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삼각법에 의해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지적도를 만들고 토지대장을 비롯한 각종 장부를 작성하였다. 이때 작성된 지적도와 토지대장은 식민지 시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사용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은 이미 재정고문이 대한제국의 재정제도를 개편할 때부터 계획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병합 전에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사업은 할 수 없다면서 유보되었다가 191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에 들어간 것이다.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것은 조세의 근간을 이루는 지세제도를 정비하고 지방재정을 장악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재정고문과 통감의 지배 하에 탁지부 직속의 징세기관이 설치되고 중앙집권적인 징수체계가 수립됨으로써 조세수입이 크게 증가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31회 참조)
결부제 폐지 과세지가 도입
당시 토지에 대한 세금 부과는 결부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결부제(結負制)는 비옥도(생산성)에 따라 경지를 6등급으로 구분, 1등전 1결은 약 3000평, 6등전 1결은 약 1만2000평으로 정하는 지세부과 기준이다. 비옥도에 따라 1결의 실제 면적에 차등을 두어 같은 결수이면 같은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국적인 양전(토지조사)이 1720년 이후 오랫동안 시행되지 않아 양안(토지대장)에 기록된 결부 정보가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았고 처음부터 등급이나 결부가 정확하게 평가된 것도 아니었다. 대한제국 수립 후 한 차례 양전이 추진되었지만(광무양전) 완결되지 못한 채 중단되어 실제 이용되지는 못하였다. 이와 함께 삼남지방은 이동이 빈번한 소작인이 지세를 납부하는 것이 관행이어서 납세의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았던 문제도 있었다. 총독부는 이에 따라 결부제를 폐지하고 과세지가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1914년에는 지세령을 내려 납세의 책임이 지주에게 있음을 확정하였다
소유권 증명 제도 필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또 다른 이유는 토지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제도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토지대장으로 양안이 있었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실제와
은 차이가 났을 뿐 아니라 양안에 새로운 소유자 기록란이 없어 소유권 이전 사실을 기록하는 일이 불가능하였다(8회 양안 사진 참조).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새로 작성된 토지대장은 토지 필지마다 공란을 남겨두어 소유자가 바뀌면 그 내용을 차례대로 기재할 수 있었다(그림). 이러한 장부 양식의 차이는 종전의 양안이 재정수입의 기초인 결수를 확정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데 비해 새로운 토지대장은 재정수입은 물론 소유권 변동까지 염두에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토지의 정확한 형상과 위치 면적을 알 수 없어 경계를 둘러싼 분쟁이 생겨도 판정하기 어려웠으나 토지 측량으로 지적도(그림)가 도입됨으로써 그러한 문제가 해결되었다.
물론 토지조사사업 이전에 토지소유를 증명하는 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부터 문기(文記) 또는 명문(明文)이라고 하는 토지매매문서가 작성되어 이를 근거로 소유를 증명하고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기와 명문은 민간에서 작성한 사문서였기 때문에 도난이나 분실의 위험이 있었고 위조된 문기를 가지고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자에게 대항하기 곤란하였다. 서로 잘 아는 좁은 지역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 간 거래하기에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지역사정에 생소한 일본인 입장에서는 토지 소유권을 국가가 증명해주는 제도가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모든 토지에 대해 소유권이 명확해지고 등기제도를 통해 공시하도록 하는 제도가 수립되었다. 토지소유자의 소유권이 법적 보호를 받게 되면서 지주들은 은행에 토지를 담보로 자금을 빌릴 수 있어 지주경영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인들에게는 토지매입이 용이해져 이민과 농업투자를 유도하였다.
또한 결부제 대신 ‘과세지가’ 제도가 확립되었다. 지세의 세율은 당초 일본 본토와 동일하게 과세지가의 3%로 할 방침이었다가 1.3%로 인하되었다. 이는 과세지가 당초 예상 276만 정보에서 487만 정보로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은결’이라고 하여 누락되었던 토지가 추가로 파악되기도 하였지만 결부 면적이 실제보다 낮게 책정되어 있었던 탓도 있었다. 지세율 1.3%는 대체로 생산액의 3% 수준이다. 1918년 당시 일본 본토 지세의 10~30% 정도의 부담이었다.
소유권 분쟁 국유지에 집중
일본이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민간의 토지를 대규모로 약탈하였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 동척이나 일본인 이민에게 토지를 공급하기 위한 국유지를 창출하기 위해 ‘신고주의’의 방법으로 소유자를 결정하였으며 자기 땅이라고 신고한 사람을 소유자라고 했기 때문에 정보에 어둡거나 총독부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신고를 기피하였고 그 결과 많은 땅이 국유지가 되거나 소유자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신고에서 누락된 토지는 9355필지로 전체 필지의 0.05%에 불과하다. 당시 자기 땅에 대한 소유 의식이 매우 높았고 여러 차례 지세 징수과정에서 소유자를 납세자로 파악하고 징세대장이 작성되어 신고서와 대조하였기 때문에 아무나 자기 땅이라고 신고할 수는 없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기존의 소유권이 마음대로 뒤바뀌었다는 주장은 조선 후기 이래 성장해온 민간의 토지소유권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다. 당시 토지 소유권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분쟁이 발생한 땅은 대부분 국유지(역둔토)였다. 이는 토지조사당국이 국유지를 최대한 확보하려고 하여 무리하게 민유지를 국유지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민유지와 달리 국유지에는 국유인지 민유인지 소유권 확정이 곤란한 땅들이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국유지는 과거 대한제국의 내장원과 궁방에 속해 있던 역토, 둔토, 궁방전 등이었는데 개간이나 매입을 해 국유가 확실한 토지도 있었지만, 양안에 기재된 것과 달리 민간의 소유인 토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컨대 궁방전의 경우 형식으로는 주인이 없는 토지를 궁방에 떼어준 것이지만 이미 민간에서 개간을 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궁방 소유는 지대율도 일반 소작지보다 낮아 민간 소유주가 궁방 소유라고 되어 있는 양안을 굳이 고칠 필요성도 적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들 토지는 1908년에 황실 소유지가 국유화될 때 모두 국유지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탁지부나 임시토지조사국은 이러한 땅을 가려낼 방법이 마땅히 없어 일단 모두 국유로 사정한 다음 이의가 제기되면 심사하여 민유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될 경우 소유자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의신청을 받아들인후 최종적으로 국유로 남은 토지는 동양척식회사에 불하한 1만정보를 포함해 1918년 말 13만7304정보로 전국 경지의 3% 정도였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억울한 경우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대규모 토지수탈이 자행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적은 면적이다. 더욱이 1919년부터 1923년까지 국유지(역둔토)는 모두 소작인에게 불하됨으로써 소멸하였던 것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토지조사사업은 이미 재정고문이 대한제국의 재정제도를 개편할 때부터 계획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병합 전에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사업은 할 수 없다면서 유보되었다가 191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에 들어간 것이다.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것은 조세의 근간을 이루는 지세제도를 정비하고 지방재정을 장악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재정고문과 통감의 지배 하에 탁지부 직속의 징세기관이 설치되고 중앙집권적인 징수체계가 수립됨으로써 조세수입이 크게 증가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31회 참조)
결부제 폐지 과세지가 도입
당시 토지에 대한 세금 부과는 결부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결부제(結負制)는 비옥도(생산성)에 따라 경지를 6등급으로 구분, 1등전 1결은 약 3000평, 6등전 1결은 약 1만2000평으로 정하는 지세부과 기준이다. 비옥도에 따라 1결의 실제 면적에 차등을 두어 같은 결수이면 같은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국적인 양전(토지조사)이 1720년 이후 오랫동안 시행되지 않아 양안(토지대장)에 기록된 결부 정보가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았고 처음부터 등급이나 결부가 정확하게 평가된 것도 아니었다. 대한제국 수립 후 한 차례 양전이 추진되었지만(광무양전) 완결되지 못한 채 중단되어 실제 이용되지는 못하였다. 이와 함께 삼남지방은 이동이 빈번한 소작인이 지세를 납부하는 것이 관행이어서 납세의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았던 문제도 있었다. 총독부는 이에 따라 결부제를 폐지하고 과세지가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1914년에는 지세령을 내려 납세의 책임이 지주에게 있음을 확정하였다
소유권 증명 제도 필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또 다른 이유는 토지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제도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토지대장으로 양안이 있었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실제와
은 차이가 났을 뿐 아니라 양안에 새로운 소유자 기록란이 없어 소유권 이전 사실을 기록하는 일이 불가능하였다(8회 양안 사진 참조).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새로 작성된 토지대장은 토지 필지마다 공란을 남겨두어 소유자가 바뀌면 그 내용을 차례대로 기재할 수 있었다(그림). 이러한 장부 양식의 차이는 종전의 양안이 재정수입의 기초인 결수를 확정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데 비해 새로운 토지대장은 재정수입은 물론 소유권 변동까지 염두에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토지의 정확한 형상과 위치 면적을 알 수 없어 경계를 둘러싼 분쟁이 생겨도 판정하기 어려웠으나 토지 측량으로 지적도(그림)가 도입됨으로써 그러한 문제가 해결되었다.
물론 토지조사사업 이전에 토지소유를 증명하는 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부터 문기(文記) 또는 명문(明文)이라고 하는 토지매매문서가 작성되어 이를 근거로 소유를 증명하고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기와 명문은 민간에서 작성한 사문서였기 때문에 도난이나 분실의 위험이 있었고 위조된 문기를 가지고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자에게 대항하기 곤란하였다. 서로 잘 아는 좁은 지역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 간 거래하기에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지역사정에 생소한 일본인 입장에서는 토지 소유권을 국가가 증명해주는 제도가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모든 토지에 대해 소유권이 명확해지고 등기제도를 통해 공시하도록 하는 제도가 수립되었다. 토지소유자의 소유권이 법적 보호를 받게 되면서 지주들은 은행에 토지를 담보로 자금을 빌릴 수 있어 지주경영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인들에게는 토지매입이 용이해져 이민과 농업투자를 유도하였다.
또한 결부제 대신 ‘과세지가’ 제도가 확립되었다. 지세의 세율은 당초 일본 본토와 동일하게 과세지가의 3%로 할 방침이었다가 1.3%로 인하되었다. 이는 과세지가 당초 예상 276만 정보에서 487만 정보로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은결’이라고 하여 누락되었던 토지가 추가로 파악되기도 하였지만 결부 면적이 실제보다 낮게 책정되어 있었던 탓도 있었다. 지세율 1.3%는 대체로 생산액의 3% 수준이다. 1918년 당시 일본 본토 지세의 10~30% 정도의 부담이었다.
소유권 분쟁 국유지에 집중
일본이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민간의 토지를 대규모로 약탈하였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 동척이나 일본인 이민에게 토지를 공급하기 위한 국유지를 창출하기 위해 ‘신고주의’의 방법으로 소유자를 결정하였으며 자기 땅이라고 신고한 사람을 소유자라고 했기 때문에 정보에 어둡거나 총독부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신고를 기피하였고 그 결과 많은 땅이 국유지가 되거나 소유자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신고에서 누락된 토지는 9355필지로 전체 필지의 0.05%에 불과하다. 당시 자기 땅에 대한 소유 의식이 매우 높았고 여러 차례 지세 징수과정에서 소유자를 납세자로 파악하고 징세대장이 작성되어 신고서와 대조하였기 때문에 아무나 자기 땅이라고 신고할 수는 없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기존의 소유권이 마음대로 뒤바뀌었다는 주장은 조선 후기 이래 성장해온 민간의 토지소유권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다. 당시 토지 소유권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분쟁이 발생한 땅은 대부분 국유지(역둔토)였다. 이는 토지조사당국이 국유지를 최대한 확보하려고 하여 무리하게 민유지를 국유지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민유지와 달리 국유지에는 국유인지 민유인지 소유권 확정이 곤란한 땅들이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국유지는 과거 대한제국의 내장원과 궁방에 속해 있던 역토, 둔토, 궁방전 등이었는데 개간이나 매입을 해 국유가 확실한 토지도 있었지만, 양안에 기재된 것과 달리 민간의 소유인 토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컨대 궁방전의 경우 형식으로는 주인이 없는 토지를 궁방에 떼어준 것이지만 이미 민간에서 개간을 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궁방 소유는 지대율도 일반 소작지보다 낮아 민간 소유주가 궁방 소유라고 되어 있는 양안을 굳이 고칠 필요성도 적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들 토지는 1908년에 황실 소유지가 국유화될 때 모두 국유지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탁지부나 임시토지조사국은 이러한 땅을 가려낼 방법이 마땅히 없어 일단 모두 국유로 사정한 다음 이의가 제기되면 심사하여 민유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될 경우 소유자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의신청을 받아들인후 최종적으로 국유로 남은 토지는 동양척식회사에 불하한 1만정보를 포함해 1918년 말 13만7304정보로 전국 경지의 3% 정도였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억울한 경우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대규모 토지수탈이 자행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적은 면적이다. 더욱이 1919년부터 1923년까지 국유지(역둔토)는 모두 소작인에게 불하됨으로써 소멸하였던 것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