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법재판소(ECJ)가 한 스페인 남성이 구글 링크를 통해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자신의 과거 정보를 삭제하도록 구글 측에 요구한 소송에서 남성의 주장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사업자에게 개인정보 삭제를 요구하는 소위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를 인정한 판결로는 세계 처음이다. 이 남성은 자신이 관여한 부동산 경매에 관한 10여년 전 신문기사의 구글 링크로 인해 명예가 실추됐다며 법원 측에 소송을 제기했다. 구글은 “일반인의 인식과 동떨어진 판결”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인터넷 포털들도 대체로 비슷한 입장이다. 반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매우 중시하는 유럽에서는 찬성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인터넷상 잊혀질 권리를 둘러싼 찬반 논란을 알아본다.

○ 찬성 “개인의 프라이버시 인정하는 귀중한 판례”

ECJ는 구글을 비롯한 인터넷 검색서비스 업체들이 자신들의 검색 결과 페이지에서 시효가 지났거나 부적절한 내용을 담은 개인정보를 삭제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또 이런 검색 결과에 대해 사용자들이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링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용자가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정보는 과거 사진이나 전과 등의 법적 정보, 기업과 관련한 문서, 부당한 댓글 등이다.

유럽에서는 이미 개인정보를 활용하고 보관하는 방법에 대한 관련 법규가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이번 판결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결과다. 마크 로텐버그 전자프런티어재단(EEF) 사무처장은 이번 판결을 두고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귀중한 판례를 남겼다”고 평가했다.

소송에서 승리한 남성은 “공익과는 상관 없고 오직 개인의 존엄과 명예를 훼손하는 정보를 삭제하려고 싸웠다”며 “이번 판결로 소비자도 자신의 권리를 방어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고 기뻐했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개인정보의 무단 유출로 그렇지 않아도 사생활 침해가 심한 만큼 이번 판결이 이런 관행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특히 ‘신상털기’로 유명한 개인에 대한 부당 정보 수집으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아 이런 입장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개인정보 삭제 서비스까지 등장할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한 게 현실이니 국내에서도 유사한 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 반대 “사적검열의 일종이며 악용의 소지 많다”

부 정적인 평가도 만만치 않다. 페이스북 구글 등 인터넷 업체가 주요 회원인 ‘컴퓨터커뮤니케이션 산업협회’는 “엄청난 사적 검열의 문이 열렸다”며 “정치인이나 뭔가를 감추려는 사람이 악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더 나아가 표현의 자유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한편으로는 이번 판결의 실효성을 담보하는 것이 쉽지 않고,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법원의 판결에 따라 구글 등 업체들이 개인에 대한 원본 정보를 삭제하더라도 해당 정보가 다른 링크를 통해 복사, 재생산된 경우 이를 완전히 삭제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또한 범죄 기록 등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삭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할 경우 이는 오히려 공익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 같은 신문이 “사기 전과가 있는 이용자가 결혼을 앞두고 관련 정보의 삭제를 요청한다면 수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도덕적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민주주의기술센터(CDT) 산하 소비자 프라이버시 프로젝트의 저스틴 브룩먼 소장은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관점에서는 이번 판결이 우려스럽다”며 “과연 인터넷에서 진실된 정보와 그릇된 정보를 정확히 구분해서 삭제할 능력이 개인에게 있는지 걱정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랜 시간이 흘러 어떤 개인에 관한 정보가 일반 대중에게 더는 유의미하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 언론은 과거 기사를 삭제할 의무가 있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 생각하기

[시사이슈 찬반토론] 인터넷에서 잊혀질 권리를 인정해야 할까요
이번 재판의 당사자는 미국 인터넷 기업과 유럽의 개인, 그리고 유럽사법재판소다. 하지만 재판의 쟁점과 내용을 보면 가장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게 바로 한국이 아닐까 싶다. 인터넷, 특히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의 폭발적 유행은 가상공간에 무수한 개인정보를 쏟아내고 있다. 특히 블로그나 페이스북 등에 개인의 사생활을 자랑 삼아 올리는 게 거의 유행이 되다시피하면서 그 뒤처리도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많이 거론되는 문제는 남녀 간 과거사가 사진 동영상 등으로 인터넷에 유출돼 당사자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차별적으로 노출되는 경우다. 아직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소송은 없지만 앞으로 언제든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다. 따라서 정부와 관련 기업, 개인 모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도 이와 관련된 논의가 진행 중이다. 개인이 온라인에 떠도는 개인정보를 삭제할 수 있는 권리를 담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해 국회에 제출됐지만 18대 국회가 종료하면서 자동 폐기됐다. 인터넷 서비스 업체로 구성된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가 ‘사망자의 디지털 유산 처리방안 연구’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차제에 사회적 논의를 통해 인터넷 산업의 건전한 발전과 온라인상의 프라이버시권 간의 적절한 조화가 가능한 법·제도적인 장치를 서둘러 마련할 필요가 있다.

김선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