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7) 고대의 대외교역과 거래비용
전쟁과 교역은 양립하기 힘들다. 전쟁의 시대였던 고대에는 어떻게 대외 교역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현재 우리는 고대인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상, 클릭 한번으로 외국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놀라운 세상에 살고 있다. 정보기술과 운송 수단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지만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의 감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대는 교역에 수반되는 거래 비용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교역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교역의 이익을 충분히 누릴 수 없었던 시대였다.

거래비용은 102세로 작고한 코즈(Ronald Coase, 1910~2013)가 창안한 개념으로 쌍방 간에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거래에 수반되는 모든 비용을 뜻한다. 코즈는 시장경제 안에 명령에 의해서 작동하는 기업이 왜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시장거래에는 ‘시장을 이용하는 비용’, 거래비용이 들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코즈는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개념을 고안한 공로로 199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거래비용이 너무 높으면 약탈과 정복 당해

재화 A와 재화 B를 교환하는 아주 단순한 물물교환에도 거래비용이 소요되는데, 상대방이 가진 B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투입될 뿐만 아니라(측정비용) 내가 A를 주었을 때 상대방이 나에게 B를 양도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도 자원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집행비용). 상대방이 A를 받고도 B를 주지 않거나 계약을 파기하고 B를 돌려달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거래를 위해서 상대방을 만났다가 A를 빼앗기고 생명까지 잃을 수도 있다. 이렇게 거래비용이 높은 경우에는 교역의 이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교역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교역 외에 다른 나라의 물건을 얻기 위한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군사력을 이용하여 약탈하는 일시적인 방법도 있겠고, 병합하거나 예속상태로 만든 후에 필요한 물자를 공물로 징수하는 장기적인 수탈 방법도 있다. 3세기께 고구려는 옥저를 지배하여 맥포(貊布)와 생선, 소금, 해초류와 같은 해산물을 1000리나 되는 곳까지 등에 져서 나르도록 시켰다고 하는데(『삼국지』), 내륙국가인 고구려는 자기 지역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산을 얻기 위하여 함경도 해안지역에 위치한 옥저를 예속시켰던 것이다.

신뢰할 수 없는 상대와는 침묵교역

군사력으로 정복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는 ‘침묵교역’의 방법이 있다. 중국 남조의 송나라(劉宋, 420~479)의 『이원』(異苑)이라는 책에는 고구려와 읍루 간에 침묵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추측하게 하는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칼을 구덩이 입구에 던져 놓으면 항상 담비와 함께 사는 짐승이 구덩이에서 나와 칼 옆에 담비 가죽을 두고 돌아가는데, 다른 사람이 담비 가죽을 가지고 간 다음에야 칼을 가져갔다고 한다. 신뢰할 수 없는 상대방과 불가피하게 교역을 해야 할 경우에는 이처럼 대면접촉을 철저히 회피함으로써 거래비용을 낮추었던 것이다.

중립 지역이 안전해 교역항으로 발전

둘째는 ‘교역항’을 이용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정치적으로 특정 국가에 완전히 지배되지 않는 중립적인 지역에서 교역을 행하는 것이다.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한 다음에 낙랑군과 대방군 등의 군현이 설치되자 한반도 안으로 중국 상인들이 들어와서 활동하였다. 특히 한반도 남부해안의 변진(弁辰) 지역은 철이 많이 났기 때문에 중국 상인들과 삼한과 동예, 그리고 일본(왜)에서 철을 취하여 갔는데, 철을 이용하는 것이 마치 중국에서 돈(錢)을 쓰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삼국지』).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7) 고대의 대외교역과 거래비용
이 지역에서는 주변의 신라와 백제와 달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가 성립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로 인해 국가의 지배력이 미약한 것이 교역의 장소를 제공하기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김해의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 소국들은 낙랑군과 대방군, 백제, 신라, 왜에 교역항을 제공함으로써 번성하였는데(그림) 강력한 국가가 없어 교역의 참가자들에게 재산과 생명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만들기 쉬웠다는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4세기 초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각기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병합되고 6세기에 가야가 신라에 멸망당함으로써 이러한 교역항을 이용한 대외 교역은 쇠퇴하였다.

정복이 여의치 않은 지역과는 조공무역

셋째는 ‘조공무역’에 의한 교역이다. 조공과 책봉은 군사적으로 비대칭적이지만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는 경우에 현상유지를 위해 취한 방법이었다.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조공관계가 수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주변지역의 지배자는 지역 특산물을 조공품으로 상납하고 황제도 답례품을 하사하기 때문에 물자의 이동이 수반되었다. 더욱이 조공사절에는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상인과 물자가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나라는 한사군 설치 후에 삼한 소국의 수장인 신지(臣智)들에게 관직과 작위를 나타내는 관모와 인수(印綬)를 하사하였으며,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 고구려, 신라, 백제는 중국 남북조의 여러 왕조들과 조공무역을 행하였다.

수·당에 의한 중국의 통일왕조 수립은 동북아시아 국제정세를 전쟁으로 몰아넣었지만 결국 신라에 의해 삼국통일이 이루어지고 신라와 당나라 간에 조공관계가 수립됨으로써 조공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신라, 발해, 일본 사이에는 중국 중심의 조공관계의 틀을 적용할 수 없음에도 그것을 대체하는 수평적 외교관계의 틀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안정적인 교역이 전개되지 못하였다.

군사력 갖춘 지방호족 교역으로 세력 확장

신라에서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가려면 4개월이 걸렸다. 신라 승려 혜철은 814년에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가다가 황해도 황주에서 적발되어 일행 30명은 죽고 혼자 살아남아 중국에 겨우 도착하였다. 이처럼 고대국가는 민간의 여행이나 교역을 엄격히 금지하였는데, 교역의 이익을 국가가 독점하기 위함이었지만 자유로운 교역은 정치체제를 동요시킬 우려가 크다는 이유도 있었다. 거래비용이 매우 높은 조건에서 교역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군사력으로 교역루트를 장악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하여 지방 세력에 의한 대외교역은 고대국가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와해시키는 요인이 되기 쉬웠다.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7) 고대의 대외교역과 거래비용
신라 말기에 당나라와 일본과의 해상무역을 장악하였던 장보고의 청해진(828~851)은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군사집단이기도 하였다. 국왕의 즉위에 직접 개입할 정도로 세력이 강성해지자 중앙의 진골귀족 세력에 의하여 암살당하였지만 지방 세력의 대두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고려 왕조를 창건한 왕건이 예성강 하구와 강화도 지역의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지방 호족이었기 때문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