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의 관점에서 한국사의 흐름은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연속적인 경제의 변화를 나누는 것은 살아 있는 생선을 토막 치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래도 큰 고민 없이 나눌 수 있는 것은 첫 번째는 농업의 시작이며, 두 번째는 산업화(공업화)다.
농업의 시작은 식량 획득 방법이 수렵·채집에서 작물재배와 가축사육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동물을 사냥하고 나무열매를 따거나 물고기를 잡고 조개를 주어서 먹을 것을 구하던 사람들이 곡식을 심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중반에 해당하는 기원전 30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조, 기장, 피와 같은 잡곡이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벼농사는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1000년부터 이루어졌다고 추측되고 있다. 세계사에서는 기원전 8000년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농업이 시작되었는데, 인류학자 Gordon Childe(1892-1957)를 따라서 ‘신석기 혁명’(Neolithic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
산업화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까지 진행된 영국의 산업혁명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화석연료(석탄)를 사용하는 동력기관(증기기관)으로 기계를 작동시킴으로써 일어난 공산품 생산방법의 근본적인 변화를 뜻한다. 19세기 후반부터는 과학이 산업에 체계적으로 적용됨으로써 산업화는 한층 더 심화되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의 충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개항’(1876)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기점으로 ‘근대’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원동기를 이용한 근대적 공장이 세워진 것은 1900년대부터였지만, 본격적인 산업화는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후 특히 193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식민지기의 산업화는 일본에서 유입된 자본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에 의한 산업화는 해방 이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대를 구분하면 기원전 3000년부터 19세기까지의 장기간을 하나의 시대로 묶는 셈이 되는데, 그 사이에 변화와 발전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농업사회와 산업사회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림 참조).
‘맬서스 함정’에 빠진 농업사회
산업화 이전에는 어느 나라나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농업 인구가 19세기에 적어도 전체 인구의 85%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산업혁명이 막 시작할 무렵의 1750년 잉글랜드의 농업 인구의 비중은 65%였다. 농업은 공업과 달리 생산 과정을 자연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하고 생산 과정도 길다. 이로 인해 기술적인 인과관계를 알아내거나 생산 과정을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술 진보와 생산성 증가의 속도가 공업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다.
기술진보의 속도가 느린 농업사회는 생산의 증가가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여 생존의 위기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농업사회의 특성을 ‘맬서스 함정’(Malthusian trap)이라고 하는데, 『인구론』(1798)을 쓴 토머스 맬서스(1766~1834)의 이름을 딴 것이다. 농업사회에서도 기술의 발전이나 사회질서의 안정으로 여건이 좋아지면 경제성장이 일어나지만, 인구 증가로 인해서 총생산량을 인구 수로 나눈 1인당 생산은 결국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의미이다. 기술 진보 속도가 매우 느린 조건에서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 노동력이 농업 생산에 추가로 투입되어도 그로 인해 추가적으로 늘어나는 생산량은 차차 줄어들게 되어 결국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다.
경제성장 이끈 ‘산업혁명의 힘’
세계사적으로 보면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에 비로소 ‘맬서스 함정’으로부터 벗어나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급속한 기술 진보로 인한 생산성 증가가 인구 증가를 압도하게 됨으로써 인구가 급속히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1인당 생산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이다. 사이먼 쿠즈네츠(1901~1985)가 말하는 ‘근대경제성장’(modern economic growth)의 경제로 이행하게 된 것이다. A.매디슨의 추계에 의하면 1000~1500년의 세계 전체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0.10%에 불과하였는데, 산업화 이후인 1950~1973년에는 1.93%로 급증하였다. 1인당 GDP 증가율은 1000~1820년까지 연평균 0.05%에 불과하였으나, 급속한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산업화 이후인 1870~1913년에는 1.30%로 급증하였다.
이렇게 농업의 시작과 산업화를 계기로 삼아 한국사를 구분하면, 수렵·채집 시대, 농업사회 시대, 산업화 시대로 나누어지게 된다. 너무 간단하다고 느낄 지도 모르겠다. 농업이 시작된 이후 느리지만 뚜렷한 농업기술의 진보가 있었으며 농업생산을 담당하는 농민의 특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농업사회 위에 성립해 있는 국가의 성격도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를 살펴서 농업사회 시대를 다시 고대와 중세로 나눌 수 있지만, 서양사와는 달리 한국사에서 중세의 시작을 언제부터로 정할 것인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통일신라시대(676-935)에 고대가 절정에 이르는 동시에 중세가 싹트고 있었기 때문인데, 굳이 나눈다면 고려시대부터 중세로 나누기로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농업단계 안에서 다음과 같은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첫째 농업에서 토지이용방식이 변하였다. 신석기시대에 농업이 시작할 때는 농사를 지은 후에 15-25년 이상을 묵힌 후에 농사를 짓는 ‘장기 휴경’이 일반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휴경기간이 짧아졌다. 청동기시대가 되면 휴경기간이 5~10년인 ‘중기 휴경’ 단계로 진입하였으며 철기시대인 삼국시대 이후에는 1~2년 휴경하는 ‘단기 휴경’(휴한농법)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휴한농법이 극복되고 매년 농사를 짓는 단계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대략 고려시대 말기였으며, 조선시대에 들어가면 쉬지 않고 매년 농사를 짓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둘째 이와 같이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농업기술의 발전은 서서히 농민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발전시키고 농업생산의 기본 단위가 되는 가족경영을 공동체나 국가로부터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중앙집권적 국가의 등장
마지막으로, 농업이 시작된 이후에 이루어진 가장 큰 사회적 변화는 국가의 등장이었다. 한국사에서 국가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자족적인 공동체를 모아서 쌓아놓았다는 의미에서 ‘분절적’이며 ‘누층적’인 국가에서부터 점차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바뀌어나갔다. 통일신라시대까지 골품제의 한계를 안고 있었던 신라가 지방호족이 주도한 고려로 교체됨으로써 국가의 권력기반이 확대되었으며, 고려시대까지도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거나 향·소·부곡과 같이 이질적인 지역이 많았는데,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일원적인 지방제도(군현제)가 완성되었다. 누구라도 중앙집권적 국가의 발전이라는 일관된 흐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농업의 시작은 식량 획득 방법이 수렵·채집에서 작물재배와 가축사육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동물을 사냥하고 나무열매를 따거나 물고기를 잡고 조개를 주어서 먹을 것을 구하던 사람들이 곡식을 심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중반에 해당하는 기원전 30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조, 기장, 피와 같은 잡곡이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벼농사는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1000년부터 이루어졌다고 추측되고 있다. 세계사에서는 기원전 8000년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농업이 시작되었는데, 인류학자 Gordon Childe(1892-1957)를 따라서 ‘신석기 혁명’(Neolithic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
산업화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까지 진행된 영국의 산업혁명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화석연료(석탄)를 사용하는 동력기관(증기기관)으로 기계를 작동시킴으로써 일어난 공산품 생산방법의 근본적인 변화를 뜻한다. 19세기 후반부터는 과학이 산업에 체계적으로 적용됨으로써 산업화는 한층 더 심화되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의 충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개항’(1876)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기점으로 ‘근대’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원동기를 이용한 근대적 공장이 세워진 것은 1900년대부터였지만, 본격적인 산업화는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후 특히 193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식민지기의 산업화는 일본에서 유입된 자본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에 의한 산업화는 해방 이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대를 구분하면 기원전 3000년부터 19세기까지의 장기간을 하나의 시대로 묶는 셈이 되는데, 그 사이에 변화와 발전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농업사회와 산업사회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림 참조).
‘맬서스 함정’에 빠진 농업사회
산업화 이전에는 어느 나라나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농업 인구가 19세기에 적어도 전체 인구의 85%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산업혁명이 막 시작할 무렵의 1750년 잉글랜드의 농업 인구의 비중은 65%였다. 농업은 공업과 달리 생산 과정을 자연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하고 생산 과정도 길다. 이로 인해 기술적인 인과관계를 알아내거나 생산 과정을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술 진보와 생산성 증가의 속도가 공업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다.
기술진보의 속도가 느린 농업사회는 생산의 증가가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여 생존의 위기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농업사회의 특성을 ‘맬서스 함정’(Malthusian trap)이라고 하는데, 『인구론』(1798)을 쓴 토머스 맬서스(1766~1834)의 이름을 딴 것이다. 농업사회에서도 기술의 발전이나 사회질서의 안정으로 여건이 좋아지면 경제성장이 일어나지만, 인구 증가로 인해서 총생산량을 인구 수로 나눈 1인당 생산은 결국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의미이다. 기술 진보 속도가 매우 느린 조건에서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 노동력이 농업 생산에 추가로 투입되어도 그로 인해 추가적으로 늘어나는 생산량은 차차 줄어들게 되어 결국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다.
경제성장 이끈 ‘산업혁명의 힘’
세계사적으로 보면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에 비로소 ‘맬서스 함정’으로부터 벗어나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급속한 기술 진보로 인한 생산성 증가가 인구 증가를 압도하게 됨으로써 인구가 급속히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1인당 생산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이다. 사이먼 쿠즈네츠(1901~1985)가 말하는 ‘근대경제성장’(modern economic growth)의 경제로 이행하게 된 것이다. A.매디슨의 추계에 의하면 1000~1500년의 세계 전체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0.10%에 불과하였는데, 산업화 이후인 1950~1973년에는 1.93%로 급증하였다. 1인당 GDP 증가율은 1000~1820년까지 연평균 0.05%에 불과하였으나, 급속한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산업화 이후인 1870~1913년에는 1.30%로 급증하였다.
이렇게 농업의 시작과 산업화를 계기로 삼아 한국사를 구분하면, 수렵·채집 시대, 농업사회 시대, 산업화 시대로 나누어지게 된다. 너무 간단하다고 느낄 지도 모르겠다. 농업이 시작된 이후 느리지만 뚜렷한 농업기술의 진보가 있었으며 농업생산을 담당하는 농민의 특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농업사회 위에 성립해 있는 국가의 성격도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를 살펴서 농업사회 시대를 다시 고대와 중세로 나눌 수 있지만, 서양사와는 달리 한국사에서 중세의 시작을 언제부터로 정할 것인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통일신라시대(676-935)에 고대가 절정에 이르는 동시에 중세가 싹트고 있었기 때문인데, 굳이 나눈다면 고려시대부터 중세로 나누기로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농업단계 안에서 다음과 같은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첫째 농업에서 토지이용방식이 변하였다. 신석기시대에 농업이 시작할 때는 농사를 지은 후에 15-25년 이상을 묵힌 후에 농사를 짓는 ‘장기 휴경’이 일반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휴경기간이 짧아졌다. 청동기시대가 되면 휴경기간이 5~10년인 ‘중기 휴경’ 단계로 진입하였으며 철기시대인 삼국시대 이후에는 1~2년 휴경하는 ‘단기 휴경’(휴한농법)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휴한농법이 극복되고 매년 농사를 짓는 단계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대략 고려시대 말기였으며, 조선시대에 들어가면 쉬지 않고 매년 농사를 짓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둘째 이와 같이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농업기술의 발전은 서서히 농민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발전시키고 농업생산의 기본 단위가 되는 가족경영을 공동체나 국가로부터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중앙집권적 국가의 등장
마지막으로, 농업이 시작된 이후에 이루어진 가장 큰 사회적 변화는 국가의 등장이었다. 한국사에서 국가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자족적인 공동체를 모아서 쌓아놓았다는 의미에서 ‘분절적’이며 ‘누층적’인 국가에서부터 점차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바뀌어나갔다. 통일신라시대까지 골품제의 한계를 안고 있었던 신라가 지방호족이 주도한 고려로 교체됨으로써 국가의 권력기반이 확대되었으며, 고려시대까지도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거나 향·소·부곡과 같이 이질적인 지역이 많았는데,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일원적인 지방제도(군현제)가 완성되었다. 누구라도 중앙집권적 국가의 발전이라는 일관된 흐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