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8년 담화 : 공산당 전체회의서 주장한 선부론 >

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3) 중국의개혁·개방과 경제대국 부상
[세계 경제사] 中 시장경제 이끈건 덩샤오핑의 '1978년 담화' 아니다
지방의 농가경영체가 개혁 발단

[세계 경제사] 中 시장경제 이끈건 덩샤오핑의 '1978년 담화' 아니다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대약진운동 과정에서 수천만 명이 굶어 죽고, 문화혁명으로 경제발전이 10년 이상 후퇴했던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것은 마오쩌둥 사망 2년 후인 1978년이다. 이후 중국 경제는 급속한 성장을 이어가며 2012년 현재 국내총생산(GDP) 8조2270억달러로 세계 2위의 경제 규모로 커졌다. 중국은 21세기로 접어들 무렵부터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해왔으며 글로벌 금융위기로 선진국이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는 와중에도 글로벌 경제 성장을 이끄는 엔진 역할을 대신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중국의 경제 도약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각에서는 중국 경제를 흔히 사회주의 시장경제라고 칭하며, 개혁·개방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급속한 전환이 아닌 정부 계획에 의해 점진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경제가 도약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 경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이고 시장의 원칙과 힘에 의해 도약할 수 있었다. 중국 경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된 것은 정부 계획이 아니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말처럼 “의도되지 않은 인간 행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12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3중 전회)가 중국이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선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덩샤오핑이 주창한 ‘선부론(先富論)’에 입각한 사회주의 현대화정책이 공산당의 총노선으로 확정됐고, 이후 마오쩌둥 시대 경제시스템을 개혁했으며 대외 개방을 확대했다.

그러나 당시 제시된 개혁방안은 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멀었고, 공산당 지도자들도 시장경제로의 전환은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정책 초점이 마오쩌둥 시대의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혁명 지속이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생산력 증대, 즉 경제발전으로 옮겨진 것은 이후 중국 경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시대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중국의 개혁·개방에 시장경제를 도입한 정책으로 거론되는 것은 농촌개혁, 기업개혁, 그리고 경제특구 건설이다. 그러나 애초 이런 개혁 방안이 나왔을 때 시장경제의 도입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인민공사’의 해체와 사영농업으로의 전환을 가져온 농촌개혁 방안으로 알려진 ‘농가책임경영제’ 도입은 중국 정부에 의해 이뤄진 게 아니었다. 대약진운동으로 피폐한 농업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해 중국 정부는 1979년 주요 농산물 가격을 크게 올리는 조치를 취했을 뿐 계획경제와 집단농업에서 벗어날 의도는 전혀 없었다. 농가책임경영제는 1976년 쓰촨성의 구룡마을과 1978년 안후이성 소강촌마을 주민이 정부 몰래 자발적으로 실험한 것이 그 시발점이다.

1979년 공산당은 사영농업 금지를 다시 한번 천명했고, 1980년 사영농업 금지 완화도 산악지역 등 일부에만 국한해 허용했다. 제한적으로 혹은 비밀리에 행해진 농가책임경영제의 성공을 중국 정부가 인정하면서 ‘인민공사’의 해체로까지 이어진 것은 1982년이었다. 따라서 농촌에 시장경제를 도입한 개혁은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시행된 사영농업의 성과로 인해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어 이뤄진 것이었다.

기업개혁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1978년 이후 중국 정부는 국영기업 개혁방안을 도입했으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개혁 내용은 이윤의 정부 상납 폐지 및 법인세화, 국영기업에 대한 자율권 확대 등이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국영기업은 모든 경영 부문에서 계획경제의 부산물인, 거미줄처럼 얽힌 규제와 맞닥뜨려 기업 내부의 생산성 향상보다 정부기관과의 협상에 매달렸다.

기업개혁이 가격기구와 시장의 원칙에 따른 생산성 향상과 이윤 추구를 경영의 목적으로 유도하지 않는 한 이런 개혁은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중국 국영기업 개혁은 여실히 보여줬다.

기업부문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나타난 것은 오히려 자생적인 사영기업의 등장과 향진기업의 발전 때문이었다. 1978년 이후 지방정부가 소유한 향진기업의 약진은 놀라운 수준이다. 향진기업의 성공은 향진기업을 소유한 지방 향촌 정부가 기업가와 같은 환경에 놓여 있었고 많은 향진기업이 실제로 사영기업이었기 때문이다. 향진기업은 국영기업과 달리 예산 제약이 분명했던 반면 정부로부터의 관료적 통제는 없었다.

따라서 향진기업은 지역 시장 수요와 기회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이것이 향진기업이 약진할 수 있던 원인이다. 또한 향진기업의 약진은 국영기업의 독점을 혁파하고 중국 경제에 경쟁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중국 개혁·개방의 대표적 정책으로 알려진 민간부문 사영기업의 등장과 도약도 정부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마오쩌둥 사후 문화혁명 당시 농촌으로 보내졌던 지식청년이 대거 도시로 귀환함으로써 심각한 고용문제가 발생했다. 도시귀환 청년은 도시 인구의 10%에 달했는데 사영기업이 허용되지 않던 당시 중국에서 이들은 모두 국가의 책임이었다.

따라서 심각한 도시 실업문제로 인해 민간의 사영기업은 자생적으로 등장했고, 사회 불안을 우려한 중국 정부도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보완한다는 명분 아래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사영기업의 등장은 고용 증대를 통해 중국 사회를 오히려 안정시켰으며 기업가를 양성하고, 중국 경제의 자본주의화를 촉진시켰다. 중국 정부는 1981년 민간부문 사영기업을 인정했지만 이에 대한 차별을 없앤 것은 시장경제를 중국 사회주의의 한 부분으로 공식 인정한 1992년이다. 이는 그만큼 중국 정부와 공산당이 민간경제와 사영기업의 포용을 주저했으며 대량실업과 사회불안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세계 경제사] 中 시장경제 이끈건 덩샤오핑의 '1978년 담화' 아니다
선전 등 경제특구의 건설은 해외 자본 유치를 통해 사회주의 경제를 보완하려 했던 처음 의도와 달리 중국 경제의 고도 성장, 그리고 자본주의화를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농촌개혁 및 기업개혁과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은 정부 계획이나 의도가 아니라 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시장의 힘과 원칙이 관철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 경제의 부상이라는, 20세기 후반부터 나타난 세계사적 사건은 정부와 시장의 적절한 조화로 설명할 수는 없으며 시장의 힘과 원칙이 관철된 역사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송원근 < 한국경제연구원 공공정책연구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