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한국 경제 '엔저 비상'…수출경쟁력 '급브레이크'
2013년의 마지막 날, 원·엔 환율은 5년 만에 최저치인 994원29전까지 하락했다. 엔저 충격과 미국의 양적완화(중앙은행이 발권력 동원으로 통화공급을 증가시켜 경기를 부양하는 것) 축소 시행이 맞물리면서 환율시장과 주식시장이 함께 요동쳤다. 엔화에 대한 원화 가치는 1년 전과 비교할 때 23.5%나 상승해 한국의 수출 경쟁력 하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는 일본 제품과 경쟁하는 한국 제품이 가격을 전혀 올리지 않아도 20% 이상 비싸진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일본은 엔저로 수출기업의 호황과 주가 상승 등 호재를 누리면서도 수입 공산품 가격 인상 부담이 커지고 있고 주택 관련 대출 금리 상승 등 부작용도 불거지고 있다.

#5년 만에 원·엔 환율 최저

코스피지수가 44.15포인트 급락하는 등 새해 증시 첫 거래일에 한국 증시는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기업들의 실적 충격과 함께 ‘환율 공포’가 겹치면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증시의 대표 기업들 주식 가격이 급락한 때문이다. 무엇보다 원·엔 환율이 5년 만에 최저치인 994원29전까지 하락하면서 발생한 ‘엔저쇼크’가 증시 급락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엔화 약세가 지속되면서 수출기업의 이익 감소 우려가 커진 데다 환차익을 노린 외국인 매물까지 크게 늘어 엔화 가치 하락이 더 가중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정부도 엔저 리스크를 걱정하는 모습이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경제동향(그린북)’ 1월호에서 엔화 약세 흐름을 주요 대외 리스크 요인으로 공식 추가했다. 정미영 삼성선물 리서치센터장은 “앞으로 원·엔 환율이 얼마나 떨어질지 가늠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경제 전문가들 역시 작년 상반기 아베노믹스(일본 아베 총리가 20년간 계속된 경기침체를 해소하기 위해 통화공급 확대, 엔화 평가절하, 공공 투자 확대 등을 골자로 한 경제성장 정책)로 시작된 엔화 약세에 이어 현재는 ‘2차 엔화 약세’ 국면에 진입했다고 평가하며 이미 엔·달러 환율이 크게 오른 만큼 일본과 경합하고 있는 우리나라 수출기업들의 타격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美·日 사이 '샌드위치' 우려

올해 미국은 그동안의 양적완화 규모를 축소하기로 하였으나 일본은 통화정책 완화를 지속하면서 미국과 일본이 상반된 통화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에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한국 경제가 ‘환율전쟁의 포로’ 신세가 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시행으로 미국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있고 엔화 가치가 크게 하락하는 상황 속에서 환율 변동 위험에 휘둘릴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 업체들과 경쟁하는 기계업종 기업들은 이미 엔저 습격으로 영업이익이 줄줄이 줄어들고 있다. 이상우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기계산업은 일본업체와의 경쟁을 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엔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면 해외시장에서 경합 중인 한국업체들의 가격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엔화가치 하락은 향후 추세적으로 지속될 것으로 예측된다. 기계산업 외에도 일본 제품과 경합도가 높은 자동차부품, 전자, 휴대폰 관련업체들 역시 수익성이 악화되고 가격경쟁력 약화로 매출도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日은 산업개편으로 엔高 극복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하다.”

지난 6일 박근혜 대통령이 엔화 대비 원화값의 상승 때문에 국내 수출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 대한 질문의 답변이다. 박 대통령은 “기업들이 원가를 절감하거나 구조조정을 해서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로 삼고 또 적극적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야 한다”며 이같이 답했다.

원·엔 환율 하락이 수출전선에 악재인 것은 맞지만 그 공포감은 과장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기업들은 환율 하락에 비명을 지르지만 모니터링을 해보면 늘 실제 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본 역시 엔고 시절 기업의 피해는 우려만큼 크지 않았다. 정부와 기업이 힘을 함쳐 산업구조 개편 등으로 엔고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엔화 강세를 역이용해 부품 수입을 증대시켜 비용 절감의 기회로 삼기도 했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달러당 240엔에서 220엔으로 급등하였고 1987년엔 143.75엔으로 플라자 합의 당시보다 40.6% 절상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일본은 엔고에 따른 수출경쟁력 약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산업구조를 수출에서 내수산업 중심으로 개편했고, 수출업체들도 수출에서 내수 중심으로 생산을 조정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공공투자 확대, 감세, 주택 투자 촉진, 수입 확대 등을 골자로 한 경제대책을 실시하기도 했다.

물가 3개월째 하락…유로존 '일본식 디플레' 우려 커진다

[Focus] 한국 경제 '엔저 비상'…수출경쟁력 '급브레이크'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의 물가가 지난해 12월 또 떨어졌다. 유럽연합(EU) 통계청인 유로스태트가 7일(현지시간) 발표한 소비자물가지수(CPI)는 0.8%(전년 동기 대비)로 3개월째 1% 아래에 머물렀다.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시장에선 유럽중앙은행(ECB)이 어떤 대응을 내놓을지 주목하고 있다.

유로존 CPI는 지난해 10월 0.7%를 기록한 뒤 3개월 연속 1%대를 넘지 못했다. ECB의 정책 목표는 2%다. 장기적인 물가 흐름을 볼 수 있는 근원물가지수(곡물을 제외한 농산물과 석유류 등 가격 변동이 심한 품목을 제외한 물가)는 지난해 12월 0.7%로 사상 최저치를 찍었다. 물가 하락세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계속되는 물가 하락은 유로존 재정위기의 문제점이 해결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은행의 돈줄 죄기→기업 활동 침체→실업률 상승→소비 저하→물가 하락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의 관심은 ECB가 디플레이션 우려에 어떻게 대응할지다. 올해 1, 2월에 물가가 반등하지 않는다면 ECB도 뭔가 대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게 시장의 전망이다. ECB가 쓸 수 있는 수단으로는 일단 추가적인 금리 인하가 꼽힌다. 하지만 기준금리가 더 떨어지면 안 그래도 어려운 역내 은행들의 경영난을 가중시킬 수 있다. 회원국 국채나 회사채 구매를 늘리는 양적완화 정책을 쓸 수도 있지만 옌스 바이트만 분데스방크 총재로 대표되는 ‘매파’ 정책위원들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다.

손정희 한국경제신문 연구원 jhs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