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Issue] 줄타기하는 옛 소련 국가들…러·유럽 "내 품으로 오라"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돼 15개 공화국으로 나뉘어진 지 어느덧 22년이 흘렀다. 최근 들어 동구 국가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러시아와 서유럽 중심인 유럽연합(EU)의 힘겨루기가 가속화되고 있다. 러시아는 ‘유라시아(유럽과 아시아의 합성어)’란 개념을 들고 나와 옛 소련권 맹주 자리를 되찾겠다는 야망을 드러냈고, EU는 유럽의 ‘정신적 범위’를 옛 소련 지역까지 확장하려 힘을 쏟고 있다. 양측의 무기는 ‘경제 협력’이다.

# 러시아·EU '소비에트 경쟁'

‘소비에트 경쟁’의 포문을 먼저 연 건 러시아다. 러시아는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발트 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과 조지아를 제외한 11개국이 만든 독립국가연합(CIS)의 실질적 수장이 된 뒤부터 ‘유라시아연합(EAU·Eurasian Union)’ 구축의 꿈을 키워 왔다. 지난달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5년 1월 정식 통합기구를 출범시키겠다는 로드맵 구상을 발표한 EEU는 EAU의 전 단계 조직이다.

EU는 2004년 ‘EU 동부 파트너십’ 구상 추진을 발표한 후 2009년 5월부터 정식 협상에 들어갔다. 현재 EU 동부 파트너십 협상 대상인 옛 소련 국가들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조지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등 총 6개국이다. EU는 이 협상에서 자유무역과 비자 면제, 경제 협력을 토대로 이들을 역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확대정책을 시도 중이다.

러시아와 EU가 부딪치게 된 계기는 우크라이나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달 21일 이 협상을 잠정 중단하겠다고 선언했고, 러시아는 지난 17일 우크라이나에 150억달러 자금지원 및 천연가스 공급 가격 33% 인하 혜택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급기야 양측의 싸움은 세계무역기구(WTO)에까지 번졌다. 러시아는 지난달 24일 자국 제강업 및 비료업계가 EU의 불공정 관세로 손실을 보고 있다며 WTO에 EU를 제소했다. 앞서 EU는 러시아의 수입 자동차 재활용세 부과를 WTO에 제소했다.

# 세갈래로 나뉘어 '눈치보기'

옛 소비에트 연방 소속 국가들은 세 갈래로 나뉜다. EU 쪽으로 간 곳도 있고, 러시아에 밀착한 국가들도 있다. ‘양다리’를 걸친 채 추이를 지켜보는 나라들도 있다.

지정학적으로 서유럽에 가장 가까운 발트 3국은 일찌감치 EU에 편입됐다. 발트 3국은 2004년 나란히 EU 회원국이 됐다. 이 중 에스토니아는 2011년에 유로화 사용을 시작했으며, 라트비아는 올 1월1일부로 18번째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 회원국이 됐다.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 눈치를 보고 있지만 EU 동부 파트너십 협상국 명단에 이름을 올려 놓았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미 EU로 돌아선 국가들을 압박하고 있다. 지난해 EU 동부 파트너십 정상회담 주최국이었던 리투아니아는 지난해 10월 러시아로부터 유제품 수입을 전면 중단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리투아니아는 유제품이 전체 농산물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고, 또 이 가운데 85%를 러시아에 수출하고 있다.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은 옛 소련 시절부터 러시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두 나라는 천연자원과 공산품 중 약 70%를 러시아로부터 수입할 정도로 러시아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다. 러시아 리아노보스티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 2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벨라루스 연방국가 최고회의’에서 벨라루스에 20억달러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현재 EU 동부 파트너십에도 참가 중인 벨라루스가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다.

몰도바 아르메니아 등 소국들은 EU 동부 파트너십 협상과 EEU 옵서버 명단에 동시에 올라 있다. 하지만 이들은 우크라이나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EEU 옵서버인 우크라이나가 EU 동부 파트너십에 적극 나섰다가 러시아로부터 ‘철퇴’를 맞은 후 친러 노선으로 급선회한 뒤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 승패 좌우할 각종 변수들

지금까진 EU의 ‘동진(東進)’을 막으려는 러시아에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현재 신용등급이 투자 부적격 상태인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지원이 확정되자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로부터 신용등급 전망이 ‘부정적’에서 ‘안정적’으로 상향 조정됐다.

‘세계의 경찰’ 미국의 힘이 빠진 것도 러시아엔 유리하다. 러시아는 지난해 9월 미국의 시리아 내전 군사 개입 직전 시리아 측에 화학무기 포기를 설득한 중재안을 내놓는 ‘신의 한 수’로 외교전에서 미국에 판정승을 거뒀다. 지난 11월 말 기준 5243억달러(약 553조원)로 세계 4위인 외환보유액도 러시아의 힘이다.

그러나 변수도 적지 않다. 푸틴 대통령의 지나친 독주에 대한 미국과 서유럽의 경계심이 큰 데다 천연가스와 석유, 국유기업 중심 투자에만 기대고 있는 러시아의 경제 구조가 언제까지 지탱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몸살' 앓는 우크라이나…러·EU 틈새서 '좌불안석'

[Global Issue] 줄타기하는 옛 소련 국가들…러·유럽 "내 품으로 오라"
현재 러시아와 유럽연합(EU) 간 힘겨루기로 인해 가장 몸살을 앓는 나라는 지리적으로 동·서 유럽 사이에 걸쳐 있는 우크라이나다. 특히 이곳에서 최근 한 달 넘게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는 원인엔 뿌리 깊은 반러 정서와 이를 둘러싼 자국 내 권력다툼이 자리하고 있다.

시위의 표면적 이유는 지난달 21일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EU와의 경제협력 협상을 돌연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이 소식에 수십만 명의 우크라이나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처럼 큰 파문을 몰고오게 된 건 우크라이나 정부 결정이 자국민의 반러 정서를 자극한 탓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러시아를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는 17세기부터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하기까지 러시아로부터 핍박받았던 역사 때문이다. 특히 1932~1933년엔 스탈린 정권의 강제 식량 수탈로 약 800만명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주역이자 친미·친EU 노선을 표방한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 간 갈등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오렌지 혁명 당시 부정선거 논란으로 당선이 무효화됐던 장본인인 야누코비치는 2010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듬해에 티모셴코를 권력 남용 혐의로 투옥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잔다르크’ 티모셴코에게 이번 반정부 시위는 새로운 기회가 됐다. 티모셴코는 단식투쟁을 하며 반정부 시위대를 독려했고, 옥중에서 실질적인 야당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