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의 교양 ⑧
[한 문장의 교양] (7) E.H.카 "어떤 역사를 쓰느냐가 사회의 성격을 암시한다"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2)

지난주에 이어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복습을 해볼까요. 개인에게 기억이 그런 것처럼 공동체에는 역사가 정체성의 뿌리입니다. 한 공동체가 자신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교육하는가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회가 어떤 역사를 쓰느냐, 어떤 역사를 쓰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 더 그 사회의 성격을 뜻깊게 암시하는 것은 없다.”

그러니 오늘의 한국 사회를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됩니다. 우린 무엇을 기억하지 않고, 무엇을 기억하고 있나요? 역사를 어떻게 교육하는지를, 어떤 역사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회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역사를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봤습니다. 역사 서술이란 단순하게 과거의 사실을 모아 정리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고 역사가 마음대로 주관적 해석을 해서도 안 됩니다. 역사를 쓰는 건 오늘을 사는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들과 대화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오늘의 입장에서 과거를 조명하고, 과거를 통해 오늘을 반성하는 것. 역사 서술이란 그런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대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입니다.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결코 일방적인 과정일 수는 없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양자를 더 깊게 이해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




그런데 의문이 하나 듭니다. 주관적 해석자인 역사가가 과거 사실과의 대화를 거쳐 구성하는 역사가 과연 객관적일 수 있을까요? 역사가와 과거 사실이 대화를 나눈다면 그 대화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역사가일 것입니다. 최종 서술자는 결국 역사가이니까요. 그렇다면 아무리 과거 사실과의 부단한 대화 과정을 거쳤다 할지라도 역사는 끝내 역사가의 역사가 돼버립니다. 주관적 해석은 불가피해지고 자칫 잘못하면 도를 넘어선 역사 왜곡마저도 일어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역사가가 객관적 입장을 취하면 되는 일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가 또한 사람인 이상 어떤 입장을 미리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모든 사람은 나름의 문화적 이해와 배경지식, 신념체계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무엇인가를 해석할 때는 그러한 배경 이해의 틀 속에서 해석 작업을 수행할 수밖에 없죠. 카 또한 이것을 지적합니다.



“역사가의 지식은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사람들이 여러 나라에서 그 축적에 참가해온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즉, 그 행위를 연구하는 당사자들만 하더라도 진공 속에서 행위한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과거 어느 사회의 문맥 속에서, 또 그것에 충동을 받으면서 행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는 다른 많은 개인과 똑같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며, 그가 속한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그 사회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대변인이다. 그런 자격으로 그는 역사적 과거의 사실에 접근해 가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


카의 말대로 역사가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산물입니다. 그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 문화를 해석의 틀로 갖고 있기 때문이죠. 역사 논쟁이 특정 역사가에 대한 마녀사냥으로 흘러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역사 서술은 사회적, 문화적 맥락의 산물이니까요. 가령 동아시아에서의 침략 전쟁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역사 서술 밑바탕에는 (역사서술가의 왜곡된 시선 이전에) 많은 일본인의 잘못된 역사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우리 사회의 역사 논쟁이 특정 집단에 대한 비난에 머물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 어떤 역사 서술이 어느 정도 사회적 호응을 얻었다면 그것은 이미 한두 사람의 역사서술가의 문제에 국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역사가는 그리 객관적이지 못합니다. 역사가에 따라 역사 서술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역사의 객관성은 꽤나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의 객관성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자칫 역사는 주관적 왜곡에 불과한 일이 되버릴 수도 있습니다. 카 또한 더 좋고 더 객관적인 역사 서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 역사 서술이 다른 것보다 더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달리 묻자면 역사 서술의 객관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카의 말을 들어볼까요?



“어떤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첫째, 그 역사가가 사회와 역사 속에 놓여 있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제한된 시야를 뛰어넘는 능력, 지난번 강연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반쯤은 어떻게 자기가 이 상황 속에 휘말려 들어가 있는가를 인식하는 능력, 즉 완전한 객관성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그 역사가가 자기 견해를 미래에 대해 투입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상황에 전적으로 국한되어 있는 역사가들보다는 과거에 대해 더 깊고 더 지속적인 통찰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완전한 역사’를 쓸 수 있다는 액턴의 자신감에 동조하는 역사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에 비해 보다 영속적이고, 또 완전성과 객관성이 더 많은 역사를 쓰는 역사가들은 있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진 역사가들이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에 대한 이해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비로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번 강연 때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역사란 과거의 여러 사건과 차차 나타나는 미래의 여러 목적 간의 대화라고 불렀어야 옳았을 것이다.”



역사 서술이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역사가 자신이 객관적이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할 때 역사가는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일 테니까요. 더 중요한 것은 미래적 가치입니다. 카의 말은 이렇습니다. 객관적인 역사 서술은 올바른 미래적 전망을 확보하고 그것을 기준삼아 과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좋은 역사가란 앞으로 만들어야 할 좋은 세상의 청사진을 그려내어 그에 비추어 과거를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가령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이 자유로운 세상이라면, 우린 자유라는 가치에 비추어 과거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평화가 과거 해석의 기준이 되겠지요. 역사란 과거에서 과거만을 보는 게 아니고, 과거와 함께 현재와 미래를 함께 읽어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역사 읽기란 과거를 향한 회고라기보다 미래를 향한 도약입니다. 그래서 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역사란 과거 사건들과 미래의 목적 간의 대화이다.”

김영수 S·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